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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정군칠 시집 '바다의 물집'의 시

by 김창집1 2024. 5. 16.

 

 

바다의 물집

 

 

환한 빛을 따라 나섰네

지금은 달이 문질러 놓은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

여에 부딪치는 포말들을

바다의 물집이라 생각했네

부푸는 바다처럼 내 안의 물집도 부풀고

누군가 오래 서성이는 해변의 밤

온통 흰 꽃 핀 화엄의 바다 한켠

애기 업은 돌을 보았네

그 형상 더욱 또렷하였네

 

제 몸 밀어내고 다른 몸을 품고서야 바다는

해변에 닿는다지

버릴 것 다 버린 바다의 화엄이

저 돌로 굳은 것일까

걸러내야 할 것들이 내게도 참 많았네

목이 쉬도록 섬을 돌았네

단지 섬을 돌았을 뿐인데 목이 쉬었네

 

파도의 청징淸澄한 칭얼거림이 자꾸만 들려왔네

깍지 낀 손 풀어 그 울음 잠재우고 싶었으나

달빛은 바다 위에서만 출렁거리고

나는 서늘한 어둠의 한켠에 오래

오래 머물지 못했네

 

 

 

 

모슬포

 

 

  모슬포에 부는 바람은 날마다 날을 세우더라 밤새 산자락을 에돌던 바람이 마을 어귀에서 한숨 돌릴 때, 슬레이트 낡은 집들은 골마다 파도를 가두어 놓더라 사람들의 눈가에 번진 물기들이 시계탑 아래 좌판으로 모여들어 고무대야 안은 항시 푸르게 일렁이더라 시퍼렇게 눈 부릅뜬 날것들이 바람을 맞더라

 

  모슬포의 모든 길들은 굽어 있더라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지나 입도 2대조 내 할아비, 무지렁이 생이 지나간 뼈 묻힌 솔밭 길도 굽어 있더라 휘어진 솔가지들이 산의 상처로 파인 암굴을 저 혼자 지키고 있더라 구르고 구른 몽돌들이 입을 닫더라 저마다 섬 하나씩 품고 있더라

 

  날마다 나를 세우는 모슬포 바람이 한겨울에도 피 마른자리 찾아 산자고를 피우더라 모슬포의 모든 길들은 굽어 있더라 그래야 시절마다 다르게 불어오는 바람을 껴안을 수 있다더라 그 길 위에서 그 바람을 들이며 내 등도 서서히 굽어 가더라

 

 


  

수평선에 묻다

 

 

푸른 이끼 돋은 돌담 아래

水仙이 귀를 세운 날

솔동산 가파른 고갯길에 헉, 숨이 막힌다

서귀동 512번지 仲燮 없는데

절여진 온기를 어루만지며 서서히 늙어가는 집

툇마루에 소금기 짠하다

 

한 평 남짓 셋방살이 서른여섯 중섭이가 우두커니 앉아 있더라 찬찬히 바라보면 수평선은

바다의 죽음이어서 섬도, 바다도, 허공도, 삼백예순날 허기진 마디들도 적막하고 또 적막하더라

 

이 섬과 저 섬이 너무 가깝다

이 생과 저 생이 너무 가깝다

 

 


 

노을의 지층

 

 

일만 년 전 서쪽을 향해 걸어간

사내의 발자국

발자국 화석들은 모두 서쪽을 향해 있다

 

모슬포 해안과 이어진 사계리 바닷가

서쪽에는 모래무덤이 있고

모래무덤에 잠시 머물던 바람은

파도의 울음을 때려눕히며

벼랑을 타고 오른다

, 저것

일만 년 전 시간들이 겹을 이뤄 타오르는 노을

바람조차 붉게 물들이고 있다

 

몸 위에 몸을 겹쳐

들배지기 한판승을 거둔 파도가

발자국 위로 스며드는 저물녘

층층 겹겹

겹겹 층층을 이루는 것은

패총이라 불리는 조개껍데기만이 아니다

 

일만 년 전 서쪽을 향해 걸어간

사내의 발자국 위에 내 발을 얹어

나는 노을의 다른 지층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여전히 서쪽으로 향한 발자국

앞서 간 사내는 보이지 않고

발자국만 남긴 사내를 좇는 눈동자 속에도

일만 년 전 노을이 겹쳐지고 있다

 

 

                           * 정군칠 시집 물집(애지, 200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