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집 '메께라'의 시조(12)

by 김창집1 2024. 7. 8.

 

 

무명천할머니길*

 

 

피를 쏟는 절규에도

하늘은 늘 침묵했다

 

검은 돌담 넘나드는 무심한 바람 앞에

얼룩진 무명천 같은 시간이 멈춘 골목

 

파도치는 새벽마다

귀청을 찢는 총성

 

욱신대는 그날의 기억 빈 턱에 도질 때면

방울져 흐르는 침을 눈물처럼 떨구었다

 

입을 막고 산다는 건

제 상처를 감추는 일

 

소스라치게 꿩이 우는 봄 산을 뒤로한 채

때 절은 붕대 하나로 반세기를 버티는 일

 

골목 어귀 이정표가

재우치는 겨운 걸음

 

상처 많은 백년초에 까치놀이 내릴 동안

바다는 낮술에 취해 피몸살을 앓고 있다

 

---

*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 진아영 할머니 집터로 이어진 마을 안길.

 

 


 

백조일손지묘*

 

 

남북전쟁 새된 총성

섬에 미처 닿기도 전

 

군용트럭 짐칸에서 유언장을 쓰던 그 밤

 

코 닳은 검정 고무신

어둠 속을 배회했네

 

누구는 낯이 붉어

누군 또 옷이 빨개

 

예비검속 장부 속에 포승줄로 묶인 이름

 

무명無名의 백골이 되어

대정 벌에 묻혀있네

 

---

* 1950년 칠석날(820), 섯알오름에서 희생된 예비검속자들로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죽어 누구의 시신인지도 모르는 채 같이 묻혀 무덤도 같고, 제사도 같이 치르니 그 자손은 하나다라는 의미.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이들의 공동묘역이 있다.

 

 


 

만벵듸 묘역에서

 

 

청맹과니 눈어림에 하늘마저 눈을 감던

 

전장보다 참혹한 밤이 오름 아래 묻혀 있다

 

술한잔

메 한 그릇이 쓸쓸히 받든 봄날

 

 

대정 들녘 밭담들이 총소리에 무너지고

 

칠성판을 쪼아대던 그 새벽 까마귀 울음

 

만벵듸*

공동묘역에 이명처럼 울려온다

 

---

*19508, 대정읍 섯알오름에서 집단 학살된 예비검속자 공동 장지.

 

 


 

너븐숭이*

 

 

납작 엎던 옴팡밭에 땅거미가 내려온다

뜨겁게 사태 지던 핏빛 놀도 잦아들고

그날 그 울음소리만 파도로 철썩인다

 

나부끼는 깃발들이 서릿발로 들뜬 들녘

쓰러져 누운 어미 홑겹 앞섶 파고들던

젖먹이 옹알이마저 돌무덤에 잠이 들고

 

울지 마라,

말하지 마라

눈물마저 죄가 된다

 

청맹과니 정당에도 금줄은 채워지고

민방위 사이렌 소리 허공엔 금이 갔다

 

그런 밤 북촌 바다엔 된바람이 들끓었다

앵돌아진 까만 밭담 구명 뚫린 가슴마다

쑥은 또 풀빛 새살을 심지처럼 돋우는데

 

한라의 등줄기에 피가 도는 사월이면

동백과 철쭉꽃이 왜 그리 붉은지를

빗돌 밑 순이 삼촌이 귀엣말로 일러준다

 

---

*제주 43 당시 단일규모 최대의 인명피해로 기록된 북촌대학살의 현장.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