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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의 시(11)

by 김창집1 2024. 7. 7.

 

 

대흥사 연리근 앞에서

    -도민문학학교 기행

 

 

세상에 인연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우리는 모두 인연의 그늘에서 살아간다

 

부모님의 그늘에서

남편의 그늘에서

자식의 그늘에서

이웃의 그늘에서

나라의 그늘에서

하늘의 그늘에서

 

대흥사 연리근 느티나무

오백여 년 세월 동안

스치고 지나간 많은 인연같이

하늘의 뿌리에 손끝을 대어본다

아무 시름없이

하늘의 그늘 붙잡고 살아가고 싶다

 

 


 

위태로운 산담

    - 제주문화역사 나들이

 

 

아라동 언덕에 고한조와 전주 이씨 합묘 찾아

길 떠났다

가시덤불 우거진 모기 벌레 기승을 부리는 팔월 중순

왕성한 여름 수풀 해치며

긁히고 찔리고 물리며

갑인년 대흉년에 쌀 삼백 석을 나라에 헌납하고

서당을 설립하여

유학제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했던

의로운 대정현감의 묘

사방으로 조여 오는 개발 바람 부는 곳에

주인 없는 무덤처럼

고사리와 억새와 잡풀만 왕성하게 우거져있다

구름 따라 흘러가듯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운명 앞에 침묵으로 저항하는

산담에 피어난 고독한 하얀 이끼들

우람한 넓은 산담 앞에는

제물로 익어가는

갈장기만 올망졸망 맺혀 있다

 

 


 

꽃 잔대 같은 여인

    - 제주문화역사 나들이

 

 

돈두악 비석 산지에

숙부인 광주 김씨 무덤 보았다

비록, 비석에 부인의 이름 석 자는

새기지 못하였지만

후세에 위풍당당하다

가문의 벼슬과 경제력을 과시하듯

넓은 산담과 동자석이 대변해 준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숙부인 광주 김씨는 이름 대신 꽃을 남겼다

무덤가 온통 꽃 잔대로 뒤덮여 있다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듯

햇살에 부서지는 가녀린 모습 속에 보랏빛 종소리

은은하게 들려온다

죽어서도 꽃이 되고 싶은

두불 처로 살아온 여인

 

 


 

부덕량의 묘 앞에서

    - 해녀항쟁 90주년 세화리 예술제

 

 

미나리아재비 꽃으로 수놓은

노란 이불을 덮고 있는 부덕량의 묘 앞에

묵념한다

오월의 싱그러운 봄바람 곁에서

꿈을 꾸듯

하도 종달 세화 우도 시흥 오조리 지역 해녀들이

미나리아재비 꽃을 들고

파릇파릇 까까머리 새왓 사이로

올망졸망 모여들었다

 

호이호이

해녀들의 숨비소리 들리는 듯

목숨 걸고 투쟁하던 그날의 아픈 기억들이

엉겅퀴 꽃 피뢰침같이 붉게 솟아오른다

꽃다운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폐결핵을 앓다

한 송이 보랏빛 엉겅퀴 꽃으로 피어난

제주의 딸 해녀 여장부

하도리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부터

바다에서 숨비질하며

야학 강습소에서 노동의 가치를 배우고

민족자주의식을 깨우쳐

해녀 조합의 부당함에 항의하며

앞장서 투쟁했던

자랑스러운 제주의 딸

 

부춘화 김옥련 고순효 김계석도

동무 소식 궁금하여

미나리아재비 꽃을 들고 찾아온 듯

온통

노란 꽃밭이다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한그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