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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완)

by 김창집1 2024. 7. 9.

 

 

노을의 눈물

 

 

노을 속으로 외눈박이 거인의 따뜻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노을 속 기타를 치는 황금빛 수염을 가진 마법사들이 벌레 먹은 구름 위에

살고 있다 마법사의 모자 속으로 뜨거운 강이 흐르고 있었다

난쟁이들은 뗏목을 타고 노을의 강으로 흘러들어 갔다

난쟁이들은 깊은 잠을 자기 위해 간혹 햇살로 모습을 바꿨다

웃을 다 벗은 아이들이 맨몸으로 노을 속으로 풍덩풍덩 뛰어 들었다

크레파스를 들고 노을 속에서 신비스런 산동네와 불빛 기득한 해바라기 꽃밭을 그렸다

잠에서 깬 난쟁이들이 노을 속에서 몸을 씻고 허겁지겁 아득한 사과를 먹었다

죽은 새들이 박제되어 앉은 우거진 숲

간혹 박제된 새가 살아서 구름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노을은 거인의 붉은 혓바닥 같았다

어린 사슴 한 마리 노을의 식탁 위에 자란 풀 무더기를 씹으며 아찔하게

구름과 구름 위를 뛰어다니고 있다

사슴이 등허리에 누군가의 얼어붙은 고독이 메말라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캄캄한 몸 냄새 배어 있는 양말 속에 노을 한 조각 떼어 집어넣는다

아버지는 쓸쓸한 얼굴로 눈을 감고 핏빛 노을을 건넌다

더럽혀진 양말 속에 아버지의 슬픈 눈빛이 고여 있다

노을 속에서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버지는 우거진 숲 속 풀잎 위에서 파르르 고개 떨구는

새벽이슬의 하얀 목숨을 보진 못했을까

아버지는 언제나 아무 대답 없이 나뭇잎에 동그랗게 맺혀 있었다

툭툭 이슬이 누군가의 눈동자처럼, 암흑을 건너는 딱정벌레 등 위로 떨어진다

아버지는 호두알 같은 울음소리를 호주머니에 주어 담고

달그락 달그락 노을 속으로 걸어가며

아픈 노을이 된다 나는 어두운 짐에서 깨어난다

노을 속에서 아버지의 붉은 입술을 꺼낸다 아무 말 없이 가셨다

노을의 냄새에 취해 휘청거리는 입술이 세상의 모든 추위들이 무섭다

창문을 열면 노을은 내 방 속으로 바람과 함께 주사기처럼 빨려 들어온다

나는 노을 속으로 깨끗한 빗물 같은 입김을 후하고 불어 넣는다

노을이 바게트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노을은 온몸을 뜯으며 바닥 위에 또 다른 붉은 노을을 만들어낸다

노을은 거대한 여인처럼 지금 출산중이다

 

 


 

혈관 속을 날아다니는 새

 

 

  입안에 차가운 슬픔이 번지면 죽은 눈으로 깨진 유리조각을 밟으며 하안 가운을 입은 그녀에게로 가고 싶다 따뜻한 피를 홀리며 가끔 졸린 눈으로 비명을 지르다가 그녀의 얼어붙은 혀 위에 날개를 내려놓고 붉은 눈물을 흘리며 잠이 든다 그녀의 떨고 있는 눈동자를 얼음 속에 가두고 싶어 그녀의 귓속으로 서늘한 그늘을 집어넣고 싶어 가끔 튀어나오는 내 울음을 피부 속에 영원히 숨기고 따뜻한 희망이 필요할 땐 서로 긁어주기도 하는 얼룩이 되지 불빛처럼 창문에 매달려 거친 숨을 쉬지

그래서 그녀는 말없는 공작새, 말 못하는 밀랍 인형

 

  기다리는 동안 내내 그녀의 현란한 깃털의 몸짓을 보며 그녀가 준 땅공 사탕을 녹이고 주사바늘 같은 침묵 속에서 뜨거워지는 어둠을 창문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차안의 소독약 냄새가 위태롭게 내려앉은 내 콧구멍 속으로 혹 들어 왔다 나는 가끔 들려오는 직박구리의 소리를 주머니에 넣어 그녀에게로 찾아갔다 내 심장에 구멍을 내며 속으로 들어가 울고 있는 직박구리 소리를 꺼내 그녀의 귓속에 면봉처럼 꽃아 넣었다 귀가 가려운지 그녀는 녹슨 창문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나는 새가 되고 그림자 없는 나무가 되고 그녀 옆에 그냥 가만히 어린 강아지처럼 누워있었다 소독약 냄새나는 차안 그녀가 내 혈관의 피를 수거해가기 시작했다 내 슬픔이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가진 병명들을 모두 숨김없이 말했다 내 슬픔의 색깔이 이렇게 포도알처럼 붉었던가 나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회색 인간이라고 생각 했는데 오직 그녀를 사랑할 때만 살아있는 부드럽고 따뜻한 손바닥이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얼굴에 손바닥을 대면 내 심장의 피가 그녀의 혈관 속으로 흘러 들어갔는데

  차오른 붉은 슬픔이 기계 안에서 살짝 흔들리며 나에게 통증을 전하고 있었다

 

  내 피를 수거하는 일은 수리부엉이의 눈알을 훔쳐 먹는 거

  그래서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도 푸른빛의 위험한 짐승들을 알아볼 수 있다

 

  내 피는 걸어 다니며 날아다니며 날카로운 발톱을 떨어뜨리고 낯선 사람들의 우울한 눈빛을 죽이고 누군가의 유서 같은 마른, 공허한 휴일을, 휴일의 바람을 가둔다 떨면서 갈기갈기 찢는다 우울한 바람은 사랑한 그녀의 완강한 목을 꺾는다

  뚝 끊어지는 민들레 목숨처럼

 

  그녀는 이슬처럼 투명하기에 그녀의 영혼을 민들레의 떨고 있는 입술에 가둔다

  목도리처럼 그녀의 목을 휘감는 것은 나의 따뜻한 피다

 

그녀를 사랑한다, 쓰고 싶다, 아무 관계도 없는 격렬한 얼굴들, 죽어가는,

다시 나의 피는 누군가에게로 흘러가고 나의 새가 다시 누군가의 새가 되기도 하고.

 

 


 

붉은 풍선

 

 

  붉은 풍선* 속에서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낙엽을 밟으며 걷는 소리였다 나는 붉은 풍선 속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둠이 무서운 날이면 풍선을 껴안고 잠을 자기도 했다 풍선은 햇살처럼 따뜻했다

 

  어릴 적 할머니는 고구마를 굽는 아궁이 옆에서 말씀하셨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한이 맺혀 하늘로 가지 못하면 붉은 풍선 속에 잠들어 이 세상을 떠돈다

 

  나는 조카에게 그 붉은 풍선을 주었다 풍선을 터트리면 세상의 태양은 사라지고 어둠이 몰려 올 거라고 풍선을 절대 터트리지 말라고 조카에게 단단히 일렀다 싸락눈이 내리던 겨울 아침 조카는 아이들과 풍선 날리기를 했다 조카의 붉은 풍선은 다른 아이들의 풍선보다 더 거대해지고 이주 멀밀리 날아갔다 조카는 되돌아오지 않는 붉은 풍선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풍선이 되어 구름 너머로 사라졌다 따뜻한 봄이 되면 사라진 조카는 호랑나비가 되어 마당 구석에 있는 꽃들 속에서 춤을 추었다

 

  가끔 눈알 없는 인형이 붉은 풍선을 입에 물고 햇살 속에서 날아다니기도 했다

 

  나는 할머니의 말을 어기고 붉은 풍선을 터트리기로 했다 붉은 풍선 안에 있는 죽은 영혼이 너무 가여워서였다 영혼은 낙엽을 바스락 바스락 밟으며 바람에 날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태양은 마침내 사라졌지만 풍선 속에서 나온 가여운 영혼들이 빛이 되었다

 

  어둠은 오지 않았고

  아이들은 매일 수백 개의 풍선을 지붕위에서 날렸다

 

  풍선 터지는 소리가 자꾸 나의 깊은 잠을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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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풍선 : ‘붉은 풍선은 드라마 제목입니다. 그 드라마 제목에서 힌트를 얻어 이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기린의 몸에서 흘러나온 노을

 

 

 별자리가 새겨진 기린 한 마리가 노을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간다

 목이 마른 기린은 노을의 흘린 눈물을 먹었다

 기린의 몸에서 아름다운 별자리들이 수없이 태어났다

 나는 기린의 몸에 아름다운 별자리를 수없이 새겼다

 기린은 가벼운 침묵 속에서 슬픔의 소리 흐르는 신비스런 우주이다

 기린의 몸에서 아픈 노을이 흘러나온다

 기린은 구름으로 만들어진 방울 달린 모자를 썼다

 모자 속에서 안개가 새어나왔고 기린은 안개가 되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 아무것도 만질 수 없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가끔 나의 손이 너의 뜨거운 심장에 닿았으면 했다

 우울한 사람들이 안개 속에 불온한 기도문을 던지고 갔다

 외롭게 땅 밑을 기어 다니던 안개가 내 몸에 달라붙었다

 안개들은 전신주 밑에 모여 은빛 안경테를 가진 돋보기안경이 되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꽃들에게 향기 나는 안경을 씌웠다

 떨어지는 붉은 꽃잎과 푸른 향기는 우울한 당신의 가슴속에 안전하게 스며들었다

 우울한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시들어버린 꽃의 향기가 햇살과 몸을 섞으며

 그늘 속에서 짙게 드리웠다

 거인들은 신비스런 꽃을 꺾어 노을 속으로 던졌다 노을은 꽃의 향기를 맡으며

 잠이 들고 기린도 따뜻한 구름 속에서 잠이 든다

 향기로운 꽃들이 노을에 녹아 빛이 되기도 했다

 그러는 날이면 거인들이 난쟁이가 되거나 난쟁이들이 거인이 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뜨거운 별들이 가녀린 내 몸에 달라붙어 몸은 녹아내리며 빛 속으로 사라졌다

 늙은 기린 한 마리가 어둡게 말라버린 노을을 끌고 빛이 없는 행성 속으로 사라졌다

 안개가 텅 빈 나의 심장을 채웠다 멈춰있던 심장의 어둠속에서 뛰기 시작했다

 다시 안개가 걷히니 아름다운 노을이 보였다

 노을 속에 누군가의 가벼운 영혼을 태운 나뭇잎이 떠다니기도 했다

 저 멀리서 어린 기린 한 마리가 젖은 꽃잎으로 만들어진 노을을 끌고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어린 기린은 안경을 썼고 향기로운 꽃들도 안경을 썼고 이 세상의 모든 우울과 빛도 안경을 썼고 우울한 우리들도 가끔 안경을 밟고 생을 가볍게 지나갔으나 그 모든 안경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안개였다 안개의 영혼이 죽어서 피어난 안개꽃으로 노을이 만들어진다 노을이 안경 쓴 기린이 되고 기린의 몸에서 흘러나온 노을 속에 아름다운 별자리들이 둥둥 떠다닌다

 기린이 뚜욱 안경 속에서 가볍게

 떨

 어

 지

 는

 소

 리

 마침내 들린다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시와 세계,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