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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의 시(4)

by 김창집1 2024. 7. 20.

 

 

11월의 숲

 

 

어느새 텅 비워낸 어리목 산정길엔

치열했던 시간을 하나둘 지워가며

휑하니 남 밑둥치

빗장 푼 햇살 한 줌

 

낙엽은 떨어지는 게 아니라 내려놓는 거다

바람 속에 스쳐가는 문구 하나 떠 올리며

예전에 굳게 닫았던,

움켜쥔 손 펴 보네

 

 


 

빙벽氷壁

    -왕이메 고드름

 

하늬바람 쌩쌩 부는 들판에 나 앉아

발가락이 얼도록 오름 한 바퀴 돌아도

구석진 담벼락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온기라곤 하나 없는 얼어붙은 세상 앞에

벼랑 끝 거꾸로 선 엘사*의 눈물 같은

언젠가 얼음 방에도 봄은 꼭 오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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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 : 에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의 여 주인공.

 

 

 

 

길 없는 길 위에서

 

 

가끔 사는 일 또한 헷갈릴 때 있다

 

사랑도 미움도 흔들리던 내 발자국도

 

어쩌면 걸어온 길이 착시였는지 몰라

 

 


 

무인도

 

 

사람도 섬이 되는 그런 날이 있다

저녁이면 물안개 이불처럼 덮여오는

새소리 물소리 잠든

해안가를 맴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좁혀서야 보이는

출렁이던 시간도 파도 속에 묻힌 채

결핍된 마음 한 자락 행구고 또 행구는

 

썰물이 지난 자리 밀물이 차오르듯

이제 막 무장해제 하루를 재워놓고

다려도 저녁놀 속에

순한 손을 담근다

 

 

                     *장영춘 시집 달그락, (한그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