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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7월호의 시(3)

by 김창집1 2024. 7. 19.

 

 

이방인 시편 - 장성호

    -어떤 산철쭉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한 줄기 바람처럼 떠나간

그 사람을 부르다 지쳐버린 한 여인,

길가에서 온몸이 색이 바랜 채

구겨진 종이처럼 변한다

어느 날 한 이방인이 그녀에게 다가와

그윽한 눈길과 따스한 손길로 그녀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는 꽃과 벌처럼

그녀 곁을 오롯이 지키며

그녀와 함께 오래오래 지내겠다고 언약했다

눈부신 봄날이 지나가자마자

그는 기약도 없이 먼길을 떠났다

그녀는 밤낮으로 그와 함께 보냈던

지난날 희미한 추억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숲속 길가에서

얼마 전까지 화사하게 피었던 연분홍 산철쭉,

바짝 시들어 슬픔을 삭인다

 

 


 

순정純情 - 정형무

 

 

어느 봄날

풀꽃 핀 방죽 길에서 한 소녀와 마주쳤다

소녀는 방긋 웃으며 지나쳤다

소녀 이름이 평아苹兒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꽃뱀 한 마리를 때려죽였다

 

반백년 흘러 비 내리는 밤길

개구리 짝 찾아 우짖는 소리

 

사랑이 가없는 그리움이라면

그 봄날 한 순간,

저만큼 온전하지 못할 터이다

 

 


 

배롱나무에게로 강혜원

 

 

두고 온 것을 이제야 미망이라 한다

한 시절, 연못에 멍울멍울 어리던 꽃 그림자

 

늦여름 감기로 앓고 난 며칠

시름시름 쌀을 안친다

맥놀이처럼

마당을 감아 도는 질긴 햇살에

오래전 꽃의 안부가 새삼스럽다

 

찬물에 만 밥 한 술과 청양고추

등줄기 후끈하고 시야가 흐려진다

 

목젖으로, 뿌리의 시간을 더듬어야

선연한 잇몸 같은 꽃이 피던가

 

제 붉음에 진저리가 나도록

몸부림

넘치는 밥물처럼

꽃이 꽃을 밀어올리고

꽃이 꽃을 받아내던

 

한 사발의 밥을 먹고

배롱나무 껍질처럼 맨들한 낯빛으로

꽃에게로 가야겠다

소리도 없이 지는 꽃그림자를

두 손으로 그러모아

오래 잊은 죄를 씻듯

붉은 밥을 지어야겠다

 

 


 

두물머리 김정식

 

 

두물머리에서 만난 동창

주머니에서 서로의 동전을 꺼냈다

 

동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라는 친구

동전은 굴러가다가 넘어지는 굴렁쇠라는 친구

동전은 기울고 차는 달이라는 친구

동전은 도적과 같은 칼이라는 친구

 

쾌속정을 타고

바나나보트를 타고

땅콩보트를 타고

속력을 내다가

급커브를 도는 순간, 우린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구명조끼를 입고

두물머리에서 굽이치는

강을 바라보며,

어느새 우리는

찌그러진 동전을 모아

저 멀리 강물 위로 던지고 있었다

 

 

                            *월간 우리7월호(통권 제43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