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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오승철 유고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의 시(7)

by 김창집1 2024. 7. 18.

 

 

고추잠자리

 

 

1

편지 한 통

받은 일 없다

삼 년 가까이

구름이 앉았다 간

텃밭에

매운 눈 껌벅이는

고추잠자리

 

2

어쩌면 우리는

잘못 든 길이어도 좋다

시든 풀잎으로 흔들리기 위하여

흔들리는 줄기 끝에나 흔들리는 것들

늦가을

그리운 이름의

꽁지가 마르는 길섶에

세상은 잠 못 이루듯이

우리의 사랑 하나로 붉은 돌무덤

 

3

빙빙 돈다

빙잉 빙 돈다

천 마리 종이학으로도

풀리지 않는 풀빛 목마름

이 땅에 온기가 남아있는 동안은

종소리 보다

커다랗게

커다랗게

슬픈 동그라미

 

 


 

고추잠자리

 

 

수평선만 보다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굽이굽이 산맥으로 이어진

북방 한계선을 봤네

 

사나흘 출어 길엔

한라산도 심으로 떠 있듯

저 봉우리들은 자꾸

잠 못 이루는 섬으로 보일 뿐이라네

 

누구를 위하여 그물을 쳤는지

태풍 오기 전날 같은

적막만이 숨 막히고

앞발 하나 잘려진 슬픈

노루의 눈빛

 

아직도 기다리는 사람아

아버님은 평생

수평선을 못 건너고

이승을 떴네

 

사람이 사는 땅엔

길이 있기 마련인데

우린 아직도

휴전선을 배경으로 서성일 수밖에

그럴 수밖에

 

가을이 오면

온 천지가 섭섭하듯이

한라산 고추잠자리

사미천까지 거슬러 와서

단풍보다 짙은 색깔로 우네

몇 마리씩 떼 지어

눈물을 참네

 

 


 

고추잠자리

 

 

이 가을 내가 살아 있음이 고맙다

어느 길에나

바람은 불어

거슬러 날아온 고추잠자리

 

가을엔 달빛에도

빨래가 마르듯

그리운 이름들도

다 마르고

이따금씩 잠의 냇가에서

붉은 꽁지 적시네

 

 


 

한 방에 자면서도

 

 

우리 가족은

따로따로

밤의 바다를 건너는 네 개의 섬

지독한 불면으로

유독

나 혼자만 표류합니다

서로 손짓도 못하고

바다가 맞닿은

아득한 별나라로

놓쳐버린 아내와 아들과 딸

익숙지 못한 뱃놈 생활이

이루지 못한 꿈보다 성가시고

포구의 가족들에게

만선의 기쁨으로

고동이나 실컷 불어 보는 게 소망인

시인

 

물살에 심이 흐르듯

밤새 맑게 씻긴

우리들의 베갯머리

새벽녘

하나씩

깨어나는 가족들이

서로 긴 여행 끝의 안부를 묻습니다

 

 

                *오승철 유고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다층,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