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추잠자리Ⅰ
1
편지 한 통
받은 일 없다
삼 년 가까이
구름이 앉았다 간
텃밭에
매운 눈 껌벅이는
고추잠자리
2
어쩌면 우리는
잘못 든 길이어도 좋다
시든 풀잎으로 흔들리기 위하여
흔들리는 줄기 끝에나 흔들리는 것들
늦가을
그리운 이름의
꽁지가 마르는 길섶에
세상은 잠 못 이루듯이
우리의 사랑 하나로 붉은 돌무덤
3
빙빙 돈다
빙잉 빙 돈다
천 마리 종이학으로도
풀리지 않는 풀빛 목마름
이 땅에 온기가 남아있는 동안은
종소리 보다
커다랗게
커다랗게
슬픈 동그라미
♧ 고추잠자리 Ⅱ
수평선만 보다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굽이굽이 산맥으로 이어진
북방 한계선을 봤네
사나흘 출어 길엔
한라산도 심으로 떠 있듯
저 봉우리들은 자꾸
잠 못 이루는 섬으로 보일 뿐이라네
누구를 위하여 그물을 쳤는지
태풍 오기 전날 같은
적막만이 숨 막히고
앞발 하나 잘려진 슬픈
노루의 눈빛
아직도 기다리는 사람아
아버님은 평생
수평선을 못 건너고
이승을 떴네
사람이 사는 땅엔
길이 있기 마련인데
우린 아직도
휴전선을 배경으로 서성일 수밖에
그럴 수밖에
가을이 오면
온 천지가 섭섭하듯이
한라산 고추잠자리
사미천까지 거슬러 와서
단풍보다 짙은 색깔로 우네
몇 마리씩 떼 지어
눈물을 참네
♧ 고추잠자리 Ⅲ
이 가을 내가 살아 있음이 고맙다
어느 길에나
바람은 불어
거슬러 날아온 고추잠자리
가을엔 달빛에도
빨래가 마르듯
그리운 이름들도
다 마르고
이따금씩 잠의 냇가에서
붉은 꽁지 적시네
♧ 한 방에 자면서도
우리 가족은
따로따로
밤의 바다를 건너는 네 개의 섬
지독한 불면으로
유독
나 혼자만 표류합니다
서로 손짓도 못하고
바다가 맞닿은
아득한 별나라로
놓쳐버린 아내와 아들과 딸
익숙지 못한 뱃놈 생활이
이루지 못한 꿈보다 성가시고
포구의 가족들에게
만선의 기쁨으로
고동이나 실컷 불어 보는 게 소망인
시인
물살에 심이 흐르듯
밤새 맑게 씻긴
우리들의 베갯머리
새벽녘
하나씩
깨어나는 가족들이
서로 긴 여행 끝의 안부를 묻습니다
*오승철 유고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 (다층,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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