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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의 시(5)

by 김창집1 2024. 8. 1.



그 사랑 어쩌라고

 

 

늦가을 길모퉁이 천진난만 들국화

누군가 떠올리다 향기로 전하고파

 

햇살도 저리 좋은 날

꺾어 둔 들꽃 송이

 

아차 하고 돌아서자 이미 때는 늦었지

하필이면 이 순간, 노란 꽃잎 만발한

 

한 번도 이루지 못한

그 사랑은 어쩌라고

 

누구에겐 사소하고 누구에겐 전부인

외마디 저항도 없이 무참히 쓰러져간

 

노랑도 그 진노랑이,

처연했던 가을아

 

 


 

번아웃

 

 

무기력한 하루를

집게발로 물었다

 

우연히 게 몇 마리 식탁 위에 놨었지

밤새워 거품을 물고 냄비 밖을 꿈꾸던

 

, 먼 길 돌아

예까지 왔었구나

 

구석진 내 방 안 고단한 다리를 펴고

턱 하니 참게 한 마리 미라처럼 누워 있는

 

산다는 건, 모험이야

암호로도 풀 수 없는

 

불면의 밤 일깨우듯 나에게 다가와

어제를 절여놓고서 오독오독 씹었지

 

 


 

배설

 

 

길바닥에 새똥들이 제 자국을 남긴다

 

이리 착 저리 착 갈지자를 그리며

 

가끔은 속 시원하게 갈겨보고 싶었다

 

몇 십 년이 지나도 내 안은 딱딱하다

 

아직도 비우지 못한 그날을 끌어안고

 

묵혔던 암울한 얘기 풀어내고 싶었다

 

 


 

맨발

 

 

때로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 때

긴 여정의 모퉁이에 약속처럼 피어난

 

물매화 마른 들녘 에

맨발로 웃고 섰다

 

초롱초롱 해맑은 그대 앞에 내가 서면

부질없는 생각들이 산비탈로 내려서고

 

슬며시 등 토닥이며

향기마저 모아준다

 

그렇게 가는 거다, 충만함도 나누며

높아진 하늘 보며 막혔던 혈을 뚫고

 

용눈이 가설무대엔

전석이 매진이다

 

 


 

남이섬 연가

 

 

무대 위 함성들이

채 가시기도 전

 

너와 나 꿈을 키우던 단단한 시간도

남이섬 노란 뜨락에 모닥불로 타오른다

 

절절했던 연인들

깍지 깐 손을 풀며

 

노랑 빨강 꽃 물든 서로의 마음 담아

늦가을 모퉁이마다 아쉬움만 쌓인다

 

뜨거운 심장 하나

가슴에 묻어둔 채

 

한 발짝 뒤돌아서 마주 선 그대와 나

잘 가라 손가락 걸던 무언의 날들이여

 

 


 

허공의 집

 

 

푸른 꿈만 좇으며

살던 시절 있었지

 

혹한의 겨울밤을 뒤척이고 뒤척이던

인제리 자작나무숲 말갛게 고인 고요

 

아무리 역주행해도

불시착 허공의 집

 

희미한 불씨 하나 산등성이 넘어서고

발아래 잎 지고서야 보이는 파리한 얼굴

 

어느 해, 저들끼리

공쟁이*를 걸다가

 

서로 등 기대고 담담하고 당당하게

폭설 속 미완의 집에 지렛대를 들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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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쟁이 : 트집.

 

 

                     *장영춘 시집 달그락, (한그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