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사랑 어쩌라고
늦가을 길모퉁이 천진난만 들국화
누군가 떠올리다 향기로 전하고파
햇살도 저리 좋은 날
꺾어 둔 들꽃 송이
아차 하고 돌아서자 이미 때는 늦었지
하필이면 이 순간, 노란 꽃잎 만발한
한 번도 이루지 못한
그 사랑은 어쩌라고
누구에겐 사소하고 누구에겐 전부인
외마디 저항도 없이 무참히 쓰러져간
노랑도 그 진노랑이,
처연했던 가을아
♧ 번아웃
무기력한 하루를
집게발로 물었다
우연히 게 몇 마리 식탁 위에 놨었지
밤새워 거품을 물고 냄비 밖을 꿈꾸던
참, 먼 길 돌아
예까지 왔었구나
구석진 내 방 안 고단한 다리를 펴고
턱 하니 참게 한 마리 미라처럼 누워 있는
산다는 건, 모험이야
암호로도 풀 수 없는
불면의 밤 일깨우듯 나에게 다가와
어제를 절여놓고서 오독오독 씹었지
♧ 배설
길바닥에 새똥들이 제 자국을 남긴다
이리 착 저리 착 갈지자를 그리며
가끔은 속 시원하게 갈겨보고 싶었다
몇 십 년이 지나도 내 안은 딱딱하다
아직도 비우지 못한 그날을 끌어안고
묵혔던 암울한 얘기 풀어내고 싶었다
♧ 맨발
때로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 때
긴 여정의 모퉁이에 약속처럼 피어난
물매화 마른 들녘 에
맨발로 웃고 섰다
초롱초롱 해맑은 그대 앞에 내가 서면
부질없는 생각들이 산비탈로 내려서고
슬며시 등 토닥이며
향기마저 모아준다
그렇게 가는 거다, 충만함도 나누며
높아진 하늘 보며 막혔던 혈을 뚫고
용눈이 가설무대엔
전석이 매진이다
♧ 남이섬 연가
무대 위 함성들이
채 가시기도 전
너와 나 꿈을 키우던 단단한 시간도
남이섬 노란 뜨락에 모닥불로 타오른다
절절했던 연인들
깍지 깐 손을 풀며
노랑 빨강 꽃 물든 서로의 마음 담아
늦가을 모퉁이마다 아쉬움만 쌓인다
뜨거운 심장 하나
가슴에 묻어둔 채
한 발짝 뒤돌아서 마주 선 그대와 나
잘 가라 손가락 걸던 무언의 날들이여
♧ 허공의 집
푸른 꿈만 좇으며
살던 시절 있었지
혹한의 겨울밤을 뒤척이고 뒤척이던
인제리 자작나무숲 말갛게 고인 고요
아무리 역주행해도
불시착 허공의 집
희미한 불씨 하나 산등성이 넘어서고
발아래 잎 지고서야 보이는 파리한 얼굴
어느 해, 저들끼리
공쟁이*를 걸다가
서로 등 기대고 담담하고 당당하게
폭설 속 미완의 집에 지렛대를 들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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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쟁이 : 트집.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 (한그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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