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비기꽃
다섯 살짜리 딸애와
바닷가에 나왔습니다
제 엄마가 땋아준 댕기머리
바위 서리와
바다가 휘어진 언덕배기
다들 떠난 자갈밭에까지
넌출넌출 피어서 일렁이는 순비기꽃
사랑이여 말하라
누가 누구를 놓친 것인가를
갈매기
하안 울음이
눅눅하게 묻어 있는
줄기 끝에서
묶인 채로 침묵하는 고향바다
선상생활에 길이 들수록
딸애가 내어미는 손가락에도
약속을 못하고
먼 바다를 봅니다
늘상
바다가 그물을 빠져나가듯
살아서 이루지 못한 것들이
저무는
하늘을 향해
어지러이 흔들립니다
사랑을 놓쳐버린
아득한 날에
♧ 수평선
아침 아홉시
도청 3층에서 내다보이는
제주시 바다는
가라앉히지 못하는 섬을
뿌연 골격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두 시간 출근길에도
어김없이 먼저 와 있는 수평선
하늘과
바다 사이
부를 수 없는 이름이
한줄기 영원한 뱃길로 떠있다
그물 같은
생활의 원고지를 엮는 일상에도
늘상 휘어지는 무게 없이
놓쳐버리는 파도 소리
우리가 이 세상을 허술히 산다 해도
어진 사람아
수평선만 있으면 좋다
이따금 지워지는
뱃길에도
무적은 뜨고
아무런 일 없는 듯이
등 돌려 살자
가을날
섭섭한 서녘 하늘이
갈매기나 날리며 저물어 가듯
애국가가 흘러 퍼지면
퇴근을 서두르는
저녁 수평선
♧ 사직서
어둠 속으로
사직서를 내밀었습니다
이제는 배에서 내린
늙은 어부(漁夫)의 소금기 절인 몰골 같은
희미한 불빛 하나가
천지연(天地淵) 하류에서
자꾸만 무너지고 있습니다
앞서간 이여,
밤이면 바닷길에 와 눕던
서귀포 수평선이
오늘 밤은 낯선 불빛에 밀려
70리 밖으로 멀어졌습니다
사람이 시는 길은
하늘이 내는데도
사방(四方) 어둠의 춤사위 속으로
길 하나는 영원히
묻혀버렸습니다
무수한 이름들이
법환 돌할망집 근처
목마른 무적(霧笛)으로 뜨고
당신은
사직서 도장보다 붉은
달을 내밉니다
♧ 달님
허구헌날 오며 가며
뉘 부르는 이 있어
몰래
하늘나라
살짝 비켜 바라보니
허, 고것
빈 소라껍데기에
바람 소리였고나
♧ 고향
언덕길 매운바람
황혼 지는 용수골
밭마다 새 낟가리
이삭 찾는 메추리
다만
내 풀매기 밭엔
쑥대풀만 자랐다
사립을 열고 드니
등불에 타는 시름
축축한 베갯머리
술이 익는 어미뜨락
배시시 웃는 그 입술이
예나같이 따습다
* 오승철 유고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 (다층,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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