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의 사상 - 김석규
뽑아내고 돌아서면 이내 돋아나 얼크러지는 풀
짓밟혀도 꺾이지 않고 금세 일어서는 끈질긴 힘
미친바람 몰아치는 앞엔 잠시 엎드릴 줄도 아는
처음부터 지켜 온 풀이야말로 튼튼한 임자였고
무너질 때마다 어깨 겯고 오는 거창한 힘이었고.
♧ 풀꽃의 자세 - 우정연
풀꽃이 풀꽃끼리 의지하는 것은
서로 외로워서라고
아무리 건들거리며 사는 그들이라 해도 마음속에는
어엿한 생각들이 종종거리는데
속마음 꺼내어 살포시 펼쳐 바라보면
웅크려 우묵하고 가난한 가슴에 외로움보다 더 무거운
처절함이 두 주먹 웅숭그리고 있는데
치졸한 세상, 춥고 배고프면 그립고 외로울 틈
있기나 할까 바람 잔잔할 때 누울 자리도 생각나는 것이지
해바라기, 파초잎에 가리지 않으려고 발돋움하고
한 톨의 빗물이라도 더 들이키려고 키를 세우고
천둥과 비바람의 난폭함에도 결코
손을 놓지 않는 건 떠밀려가지 않으려고 서로를 불끈
움켜쥐며 눈감고 버티어보는 것이다
굽이굽이 세상의 파도가 모두 잠들어야
고요의 바다가 있다는 걸 풀꽃도 알고 있다
삶은 늘 그렇듯 건들거려야 살아남는다
♧ 꿈 - 유정남
유정남을 호명하는 소리에 빈손을 내려다본다
시가 없다
가방 속 파일을 급하게 뒤적인다
한 줌의 풀과 마른 나뭇잎 몇 장이 떨어진다
시를 가져오기는 한 걸까
종이도 시도 원래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한 손이 다른 파일을 뒤적이는데
누군가 반대편 손에 마이크를 쥐여 준다
조명이 하나둘 꺼진다
사각 스피커에서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G장조가 흘러나온다
숨을 세 번 쉬고 생각나는 제목을 천천히 발음한다
사․라․진․꽃
여기까지 뱉었는데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랫니와 윗니 사이에서 현이 떨린다
사라진 꽃을 다시 더듬거린다
낭독회에 온 유령들은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검은 실루엣 사이에서 기침 소리가 난다
바람이라는 단어는 핏빛 혓바닥의 모음으로 흩어진다
배경음악이 살을 찌르는
암전의 무대에 밤새 서 있는 고문
발화하지 못하는 입술에 핏방울이 맺힌다
음표에도 금이 간다
저기요, 앞사람을 두드리면 등이 폭삭 주저앉는다
♧ 푸르게 섰을 때 나무는 어머니였지요 - 여연
오래전 산비탈에 누운 나무
풍화되어 텅 빈 몸속으로
바람이 들고 납니다
나무의 단단했던 살결은
스펀지처럼 부드럽게 변해갑니다
부스러진 나무의 살들이
바람 따라 흩어집니다
어머니, 아, 어머니
푸르게 섰을 때 나무는 만물의 어머니였지요
무성한 머리 위로 온갖 새 날고
꽃 붉고 열매 풍성하여 뭇 것을 키웠습니다
나무도 한때 청춘 찬란했습니다
굽은 가지와 노면에 드러난 뿌리
거칠어도 오래오래 그늘 내려 품었습니다
나무 아래 모여 살던 뭇 생명
지금은 부재중입니다만,
어머니, 아, 어머니
나무도 제 삶 다하여
쓰러져 누우니 모두 흩어집니다
*월간 『우리詩』 8월호(통권 434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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