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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8월호의 시(1)

by 김창집1 2024. 8. 8.

 

 

풀의 사상 - 김석규

 

 

뽑아내고 돌아서면 이내 돋아나 얼크러지는 풀

짓밟혀도 꺾이지 않고 금세 일어서는 끈질긴 힘

미친바람 몰아치는 앞엔 잠시 엎드릴 줄도 아는

처음부터 지켜 온 풀이야말로 튼튼한 임자였고

무너질 때마다 어깨 겯고 오는 거창한 힘이었고.

 

 


 

풀꽃의 자세 - 우정연

 

 

풀꽃이 풀꽃끼리 의지하는 것은

서로 외로워서라고

 

아무리 건들거리며 사는 그들이라 해도 마음속에는

어엿한 생각들이 종종거리는데

 

속마음 꺼내어 살포시 펼쳐 바라보면

웅크려 우묵하고 가난한 가슴에 외로움보다 더 무거운

처절함이 두 주먹 웅숭그리고 있는데

 

치졸한 세상, 춥고 배고프면 그립고 외로울 틈

있기나 할까 바람 잔잔할 때 누울 자리도 생각나는 것이지

 

해바라기, 파초잎에 가리지 않으려고 발돋움하고

한 톨의 빗물이라도 더 들이키려고 키를 세우고

 

천둥과 비바람의 난폭함에도 결코

손을 놓지 않는 건 떠밀려가지 않으려고 서로를 불끈

움켜쥐며 눈감고 버티어보는 것이다

 

굽이굽이 세상의 파도가 모두 잠들어야

고요의 바다가 있다는 걸 풀꽃도 알고 있다

삶은 늘 그렇듯 건들거려야 살아남는다

 

 


 

- 유정남

 

 

유정남을 호명하는 소리에 빈손을 내려다본다

시가 없다

가방 속 파일을 급하게 뒤적인다

한 줌의 풀과 마른 나뭇잎 몇 장이 떨어진다

시를 가져오기는 한 걸까

종이도 시도 원래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한 손이 다른 파일을 뒤적이는데

누군가 반대편 손에 마이크를 쥐여 준다

조명이 하나둘 꺼진다

사각 스피커에서 무반주 첼로 모음곡 1G장조가 흘러나온다

숨을 세 번 쉬고 생각나는 제목을 천천히 발음한다

여기까지 뱉었는데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랫니와 윗니 사이에서 현이 떨린다

사라진 꽃을 다시 더듬거린다

낭독회에 온 유령들은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검은 실루엣 사이에서 기침 소리가 난다

바람이라는 단어는 핏빛 혓바닥의 모음으로 흩어진다

배경음악이 살을 찌르는

암전의 무대에 밤새 서 있는 고문

발화하지 못하는 입술에 핏방울이 맺힌다

음표에도 금이 간다

저기요, 앞사람을 두드리면 등이 폭삭 주저앉는다

 

 


 

푸르게 섰을 때 나무는 어머니였지요 - 여연

 

 

오래전 산비탈에 누운 나무

풍화되어 텅 빈 몸속으로

바람이 들고 납니다

나무의 단단했던 살결은

스펀지처럼 부드럽게 변해갑니다

부스러진 나무의 살들이

바람 따라 흩어집니다

 

어머니, , 어머니

 

푸르게 섰을 때 나무는 만물의 어머니였지요

무성한 머리 위로 온갖 새 날고

꽃 붉고 열매 풍성하여 뭇 것을 키웠습니다

나무도 한때 청춘 찬란했습니다

굽은 가지와 노면에 드러난 뿌리

거칠어도 오래오래 그늘 내려 품었습니다

나무 아래 모여 살던 뭇 생명

지금은 부재중입니다만,

 

어머니, , 어머니

 

나무도 제 삶 다하여

쓰러져 누우니 모두 흩어집니다

 

 

                          *월간 우리8월호(통권 43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