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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15)

by 김창집1 2024. 8. 9.

 

 

표선

 

1.

 

만났네,

한 여인을 용궁올레 길목에서

 

섶 풀린 물소중이 높하늬에 나풀대며

볼우물 미소를 캐던 그는 분명 용녀 였네

 

곰살궂은 목소리엔 해조음이 묻어났네

귓바퀴에 찰박대는 물과 뭍의 이야기들

이어도 숨비소리에 내 심장은 뜨거워지고

 

맑디맑은 눈동자엔 수평선이 어리었네

깊이 모를 동공 속에 윤슬을 풀어놓고

밤에는 별을 끌어와 은하수로 수놓으며

 

먹보말 한 줌에도 배부르던 신접살이

초가지붕 낙숫물소리 꽃잠을 깨고 보면

수선화 노란 꽃망울 봄을 물고 있었네

 

2.

 

떠났네,

그해 사월 갈마파람 드세던 날

 

어질머리 물마루에 테왁만 남겨둔 채

간다고 아주 가리까, 물어볼 짬도 없이

 

남해용왕 부름 앞에 짧기만 했던 사랑

가슴에 구멍 뚫린 검은 돌담 올레 너머

세명주 할망당에도 문빗장이 걸렸네

 

햇살 환한 푸른 날도 파랑은 인다기에

갈매기 무동을 탄 물밑 소식 행여나 올까

망부석 하안 등대는 그림자가 길어지고

 

억새도 머리 풀고 비손하는 상달이면

한모살 백사장에 피 토하며 수는 바다

하늘도 노을을 따라 함께 젖고 있었네

 

 

 

 

겨울에서 봄으로

 

 

바람 앞에 엎드렸던 풀이 다시 일어서네

비척대던 향불 연기도 몸을 곧추세우고

까마귀 날개깃 위로 청람 빛이 도는 시월

 

젖먹이 꼭 끌어안은 평화공원 비설상*

화산도 뜨거운 숨결 겨울을 녹이고 있네

대지도 함께 달아서 봄을 밀어 올리고

 

시간의 길을 따라 햇무리로 우는 볕살

뼈를 깎듯 돌에 새긴 일만 삼천 이름들이

귀천歸天의 수의를 입고 잠든 산을 깨우네

 

넘어진 다음에야 일어나는 법을 알듯

해토머리 거죽 뚫고 초록 눈 틔우는 땅

산 아래 애기동백이 핏빛 가만 거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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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3 당시 희생된 모녀의 비극을 아기를 꼭 껴안은 모성에로 표현한 43평화공원에 있는 사상. 비설(飛雪)거센 바람에 흩날리는 눈을 말한다.

 

 


 

검정 고무신

    -섯알오름* 앞에서

 

 

별도 달도 검속당한 군용트력 짐칸 위에

 

숨죽여 앉아 있던 초롱을 켠 눈빛들이

 

지상의 마지막 안부, 긴 편지를 적는다

 

더러는 미안하고 때로는 고마운 일들

 

먼 훗날 누가 보거든 대신 좀 전해 달라

 

코 닳은 고무신 밑창에 새기고 또 새기며

 

핏빛 놀 덮쳐오던 고향 마을 어룽질 때

 

살아선 전하지 못해 길 위에 남긴 사연

 

쉰 목청 대정 까마귀 오늘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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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 대정 지역에서 예비검속을 당한 이들을 대운 트럭이 알뜨르 비행장 쪽으로 향했다. 한밤중 트럭이 신사참배 동산을 지나갈 때 예비검속자들은 죽음을 예감하며 가족들에게 자신들이 가는 곳을 알리기 위해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길 위로 벗어던졌다고 한다.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추모비 앞에는 검정 고무신이 항상 놓여 있다.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