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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8월호의 시(2)

by 김창집1 2024. 8. 11.

짝사랑

 

 

오지 않는다는 비가 오네

생각 속에 아직 비 내리지 않는데

마음 열고 햇살 받으려 했던

부끄러운 것들 벌써 젖고 있네

햇살에 바싹 말리려는 것들,

잘 말려 접어 두려 했던 것들,

미처 마음의 지붕을 덮어 놓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한 발목처럼 들판에 서 있네

돌아갈 곳 없는 비석처럼 거리에서 비 맞고 있네

마음 밖에서 한번도

비에 젖어 본 적 없었던

마음에 붉디붉은 것들 다 도드라지네

나무의 뿌리들이

굵은 핏줄처럼 산길 가운데로 뻗치듯

오지 않는다는 비 오는 날

나는야 당신 오가는 길목에 서서 비석이 되겠네

당신 가슴에 마음의 탁본을 뜨겠네

당신의 눈길 앞에선 새붉게 읽히고 싶네

 

 


 

황사 - 이상연

 

 

사계절 없는 부스스한 거울을 한참 응시하다 노트북 전원 켠다

어제 넣어 두었던 이력서들이 구직 사이트에서 폐지로 돌아다니다

벚꽃 만개한 포토뉴스에

대기업 광고 대형 전광판에 허접하게 붙었다가 떨어진다

 

한쪽 구석에서는 대학 동기들의 단체 대화방이 시끄럽다

모바일 청첩장이 뜨고 축하의 메시지가 올라오고

얇은 인터넷 뱅킹을 열어 보다 답장을 미룬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식탁과 티비와 베란다의 화초들이 묵언 중이다

문득 적막을 깨는 알림음

 

-안녕하세요 00회사 채용 담당자입니다

금번 채용 건에 아쉽게도 불합격하셨습니다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밖 봄 풍경이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떠 있다

한 치 앞도 안 보인다

 

 


 

다림질 - 이상욱

 

 

오랜 만남 뒤 이별엔 구김이 많다

빨래 더미처럼 쌓인 기억

 

판박이처럼 지워지기도 하지만

타투처럼 지을 수 없는 것도 있다

 

묵은 시간마다 김이 서려 눌어붙고

주름치마 같은 날을 세우지만

 

시간의 날은 무디어

무엇 하나 자르질 못한다

 

때때로 저 하늘 자락 먼발치

지난 시간 한쪽 끝에 김을 뿜는다

 

다려도 다려도 펼 수가 없는

 

 


 

스며든다는 것 - 이수미

 

 

혼자 누워 천정을 보는 밤이면

소매 끝을 적시던 가랑비처럼

 

너로 인해 내가 그렇게도

젖을 수가 있었을까

 

어쩌지

어쩌지

 

너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데

 

천천히 스며드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갔구나

 

 

                          *월간 우리8월호(통권 434)에서

                                *사진 : 시원한  '파도 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