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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 발간

by 김창집1 2024. 8. 15.

 

 

시인의 말

 

 

  나는 위로 받고 싶다는 말을 언제나 위로하고 싶다고 말하는 마음이다

  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해 주위를 맴돌았다 들어갈 수 있을까 멈칫거리며 용기를 내어 시작이라고 발을 디밀어본다

  힘주어 입 다물고 참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제 입을 떼기 시작했으니 내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들을 찾아가고 싶다

 

 


 

바람의 언덕

 

 

초원을 질주하는 말의 갈기처럼

생살을 찢는 바람에 등짝을 눕히고

함께 달리는 풀들이 있다

 

바람이 절벽을 타고 오르며 휘두르는 채찍에

눕고 눕히며

일어서고 일으키며

온몸이 찢긴다

 

보고도 눈감고 모른 척 물러서는 대양이 있다

 

뼈도 없이 풀들은

뿌리에 묶여 허공 같은 절벽에 기대어

손발을 비빈다

 

바람은 뿌리에 대해

어떤 단칼을 들이대고 싶은지

저린 무릎 세우고 서 있는 풀들을

발부리를 훑어 눕히며 야멸차게 매질한다

 

모든 벼랑이란 발이 위태로운 것인데

서슬 퍼런 바람에 멱살 잡힌 풀들은

더 깊게 뿌리를 움켜쥐고

찢어진 살가죽을 두텁게 울타리 친다

 

머물지 않는 바람이 어떻게 저들에게

악착같이 각인시키고 단련하는지

바람만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바람이 잦아들고 나면 안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린 풀의 순응이

체념만이 아니라는 것을,

 

바람이 풀을 드잡이하고 호흡을 고르며

절벽을 오르는 순화가

바람, 저를 단련하는 채찍이라는 것을

 

 


 

수월봉*

 

 

출구를 찾는 바람이 켜켜이 쌓여 있다

심연의 억압이 만든 상처,

날아든 불덩이를 안고 타버린 몸뚱이

바다를 향해 내달리다가 붙잡힌 허리를 뚝 잘라버리고 싶었다

 

생살을 찢고 터져 나은 울음

묵은 책장처럼 달라붙어 버린 몸

가슴에 맺힌 돌을 삼켜버 린다

시커멓게 박힌 상처 자국,

별들이 바스스 가슴을 찌를 때마다

눈을 감고 몸을 낮춰 다시 바다로 내달리고 싶었다

 

한 겹 한 겹

세월의 치맛자락이 하늘을 가리면

그날의 산고를 잊어버릴 줄 알았다

찬 바닷물의 흐름을 어루만지며 쌓인 바람은

서로를 껴안고 절벽이 되어 견뎌야만 했다

 

차가운 바다의 기억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억압의 고통은 어쩔 수 없었다

만삭의 임산부 튼살 같은 응회암의 편리片理,

 

바람의 흔적이다

 

물속의 둥근 달이 높이 치솟는다

 

 

---

*제주시 한경면.

 

 


 

삼베 조각보

 

 

팽팽한 긴장을 당기며

네 귀가 씨줄 날줄로 균형을 이루던

여문 박음질이 풀리기 시작한다

후줄근한 시간이

보듬어 쌌던 온기를 놓친다

 

삶의 편린을 조각조각 모아 붙일 때 허투루 모자란 각을 놓치지 않도록 반듯한 영역에 두 팔을 펼쳐 아귀를 맞추고 곧은 박음질로 모질게 채근했음이라

 

지나간 손바닥에

그물처럼 얽힌 끈이 낡아

당기는 당신의 힘이 가벼워지는 순간

까칠까칠 살갗을 긁던 촉감

이제 볼에 살짝 스치는 명주실로 와 닿는다

 

그렇게

엷어져 가는 기억들

한 땀도 섣불리 지워버릴 수 없는

당신의 곧은 간섭

성곽처럼 꽉 물려 견고하던 울타리

힘없이 풀리고

 

일곱 자식 거친 바닥을 다져주던 그 손,

 

바닥이 늘어지고 있다

올 사이 간격을 끌어당기고 있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서정시학, 2024)에서

                                         *사진 : 막 피기 시작한 물봉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