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오승철 유고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의 시조(9)

by 김창집1 2024. 8. 12.

 

 

소라

 

 

1

엎디어 외로운 넋

깨어져도 살리라네

내 살 속 파도 소리

휘휘 트는 마을 벌엔

청핏줄 이어갈 오늘

부활하는 태양이여

 

쫘악 벌리는 입

트여오는 푸른 하늘

서귀포 뱃고동사

살 후비는 빛일 진데

이 산천

저무는 날까지

예서 예서 살려니

 

 


 

한강교 위에서

 

 

불빛들이 썰매 타는

빙판, 바람 일어

이리 출렁이는

한 하늘의 아픔을

으깨어 눈뭉치 씹으면

아아, 찝찔한 그녀의 입술

 

서울의 한 모퉁일 싣고

열차여 어디 가나?

발가락 얼어붙고

핏줄조차 끊겼어도

이 온몸

고향 찾아 가느니

 

 


 

자배봉

 

 

문간에서 보는 산은

아득히 흐려 뵀다

 

버린 사람은

더 멀리 갔나니

활화산 머물던 터에

빈 노을만 붉었다

 

괜히 억울하면

두 눈을 감았다

산꿩은 산기슭에서

고개 묻어 운다마는

년 짐짓

저무는 봄날에

손 잡힐 듯 멀고나

 

 


 

귤꽃

 

 

해마다 이 철이면

마당을 쓸어놓고

반가운 까치라도

오는 걸로 하겠다

아침상 두고 간 아내의

발등에 지는 꽃잎

 

꿩소리도 더러는

놓치며 살기로 하지

살붙이 그릇이사

몇 없으면 어쩌리

한마당 환한 그 기약

초가까지 닿는 걸

 

 


 

 

 

가난한 사람은 손들어 봐요

가장

고독하게 남아있는 사람 손들어 봐요

제주의 길목마다

바다는

잠 못 이루는 기억들을 추스르며

누워있다

 

아버님이 이승을 떠도

지워지지 않는 우리의 겨울 수평선

놓쳐버린 것들이 많은 가슴일수록

새살이 돋듯이

살아서 많이 씻겨버린 돌일수록

말이 없다

 

친구여

이 저녁 우리가 두고 온 돌에도

먼 바다 푸짐한 눈이 내릴까 몰라

많이 놓쳐버린 사람 손 들어봐요

 

 

                  * 오승철 유고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다층,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