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라
1
엎디어 외로운 넋
깨어져도 살리라네
내 살 속 파도 소리
휘휘 트는 마을 벌엔
청핏줄 이어갈 오늘
부활하는 태양이여
Ⅱ
쫘악 벌리는 입
트여오는 푸른 하늘
서귀포 뱃고동사
살 후비는 빛일 진데
이 산천
저무는 날까지
예서 예서 살려니
♧ 한강교 위에서
Ⅰ
불빛들이 썰매 타는
빙판, 바람 일어
이리 출렁이는
한 하늘의 아픔을
으깨어 눈뭉치 씹으면
아아, 찝찔한 그녀의 입술
Ⅱ
서울의 한 모퉁일 싣고
열차여 어디 가나?
발가락 얼어붙고
핏줄조차 끊겼어도
이 온몸
고향 찾아 가느니
♧ 자배봉
문간에서 보는 산은
아득히 흐려 뵀다
버린 사람은
더 멀리 갔나니
활화산 머물던 터에
빈 노을만 붉었다
괜히 억울하면
두 눈을 감았다
산꿩은 산기슭에서
고개 묻어 운다마는
년 짐짓
저무는 봄날에
손 잡힐 듯 멀고나
♧ 귤꽃
해마다 이 철이면
마당을 쓸어놓고
반가운 까치라도
오는 걸로 하겠다
아침상 두고 간 아내의
발등에 지는 꽃잎
꿩소리도 더러는
놓치며 살기로 하지
살붙이 그릇이사
몇 없으면 어쩌리
한마당 환한 그 기약
초가까지 닿는 걸
♧ 돌
가난한 사람은 손들어 봐요
가장
고독하게 남아있는 사람 손들어 봐요
제주의 길목마다
바다는
잠 못 이루는 기억들을 추스르며
누워있다
아버님이 이승을 떠도
지워지지 않는 우리의 겨울 수평선
놓쳐버린 것들이 많은 가슴일수록
새살이 돋듯이
살아서 많이 씻겨버린 돌일수록
말이 없다
친구여
이 저녁 우리가 두고 온 돌에도
먼 바다 푸짐한 눈이 내릴까 몰라
많이 놓쳐버린 사람 손 들어봐요
* 오승철 유고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 (다층,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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