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족쇄를 풀어춰
오늘도 탈출을 꿈꾼다,
저 문만 나서면
푸른 날 성긴 시간 태초의 그 길 따라
날마다 귀향을 꿈꾸는 슬픈 눈의 목각 기린
창 너머 초록 잎새 마구마구 손 흔들면
아프리카 드넓은 저 질주의 본능으로
소나기 맞으러 간다,
겅중겅중 목 빼 들고
캄캄한 밤하늘에 별빛 총총 수놓으면
코뿔소 작은 샘터에 무리 지며 마중 오겠지
마음은 이미 달리고 있어
족쇄를 풀어줘
♧ 팔월의 시
생명이 있는 것들은 독기 어린 얼굴로
팔월의 들판 아래 만장일치 모여들어
비장한 다짐을 한다
씨알 한 톨 남기리
수은주 빨간 눈금 내려갈 줄 모르고
앞 다투며 달려오는 어긋난 시간 속에
볕에다 내다 걸어도 파랗게 익지 못하는
뜨거운 바닥을 딛고라도 건너야지
삼키기도 내뱉기도 속이 빈 강정 같은
하나둘 돌려세우다
설익은 시어 몇 줄
♧ 고지서
과속으로 달려온 출구 없는 길 위에
변명 한번 못 한 채 받아든 과태료
이제 좀 쉬어가라고, 내게 준 옐로카드
♧ 겨울엔
겨울엔 수련도
묵언수행 중이다
텅 빈
연못가에 바람의 지느러미
하늘도 가끔 내려와
물의 온도 재고 간다
♧ 폭설
얼마만의 일이랴,
꿈꾸던 이 하안 세상
새소리도 숨죽인 정적만 감도는 숲
눈 위에 노루 발자국 무릎마저 포갠다
섬과 섬 구분 없이, 바람마저 손 놓고
고요가 고요 부르며 하얗게 펼쳐놓은
태초의 길 앞에 서면 누구나 평온하다
탄성으로 질러대는 눈부신 오늘이여
층층 쌓인 삶의 무게 그마저 내려놓고
나만의 길 위에 잠시,
쉬어가도 좋겠다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 (한그루, 2024)에서
*점점 줄고 있는 남북극의 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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