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혜향문학' 2024년 상반기호의 시(4)

by 김창집1 2024. 8. 17.

 

 

                  [43 문학작품]

 

 

큰 넓궤를 가며 강상돈

 

 

동광마을 43길엔 꿩소리도 총소리 같다

까만 알맹이 총알 같은 삼동열매 곁에 두고

목이 쉰 장끼 한 마리 따발총을 쏘아댄다

 

저 하늘 별빛마저 소스라쳐 숨어든

토벌대 추적 피해 굴속에서 지낸 50여 일

오로지 연기를 피워 뼈저리게 살아야 했다

 

발각된 순간에도 두려움 안고 살길 찾아 나선

기나긴 겨울 속을 숨 헐떡이며 걸어가는

아무도 지우지 못한 길 벌벌 떨며 나도 걷는다

 

 


 

묘비명 강태훈

 

 

하늘도 울었다

43의 그해 동짓달

눈발이 간간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 소리에도 놀라던

서른 초반의 그녀는

 

밭 돌담 모퉁이에

널브러진 끔찍한

남편의 모습에 말을 잊었다

 

밭 갈고 씨 뿌리던 그에게

너무나 가혹한 참극이었다

 

정신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는 초주검이 되었었고

그러고는 세월이 흘러갔다

 

여기, 초라한 묘비명은

피 묻은 가족사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잃어버린 세월의 기록이다.

 

 


 

여옥이 삼춘 - 고은진

 

 

골목 어귀

안거리 밖거리

외양간 하나

돌배꽃 재잘대던

여옥이 삼춘집

 

오랫동안 소가 없는 외양간

귀퉁이는 벌써 허물어지고

사람 기척 드물어

고요만 감돌던 마당

 

사삼 때 끌려간 남편은

여태 소식이 없고

연좌제에 걸려

세월을 삼키던 아들

결핵으로 돌배 꽃잎 붉게 물들이다가

농약 마셔 죽고 없어

 

허리가 반으로 접힌 삼춘은

세월도 반으로 접어

어느 해부터 사월만 되면

유채꽃 머리에 꽂고 얼굴에 분칠하고

그 밤에 끌려간 남편을 기다린다.

 

이제는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은 돌배나무 아래

깡마른 삼춘 배시시 웃으며 짚었던

검고 딱딱한 지팡이

정당처럼 닫혀 움직이지 않고

마당엔 지렁이들이

흙빛으로 말라 있다.

 

 


 

다랑쉬오름 - 김승범

 

 

자네 침묵을 원하는가

곰삭은 아픔

다랑쉬오름에 제비꽃, 피뿌리풀꽃으로

피어나지 아니하는가

온통 멍든 자국 풀잎으로 가리지 말게

아무리 숨기려 한들 가슴열고 나오는 저 꽃들

잊지 못할 세월의 처절한 반항 아니겠나

좌우익 틈새에서 줄 잘못서 비명에 간 할아버지

지아비 쫒아가다 구둣발에 밟혀 쓰러진 어머니

화인으로 남아있는 겁에 질린 조카들의 오열소리

그 날을 기억하는 저 돌담속 겁에 질린 눈동자들

새까만 동공 속 이야기

웃자란 풀들이 눈 감은 체 자네의 상처를 덮어주듯

우리도 그냥 덮어두게 덮어두겠네 덮어두기로 하세

매년 이맘때면 붉은색 꽃잎들

잊자 잊자 하면서

자꾸만 자네의 가슴을 뚫고 올라오고 잊네그려

허나 자네,

이제 그만 지난 일 잊기로 잊기로 허세

 

 


 

43 동백꽃 김용길

 

 

심장살 도려내어

기수 깊은 곳에 묻어놓고

응어리진 한() 덩어리

 

빈 들꽃무덤 바라보며

눈물 세상 보내고 나니

칠십여섯 생애

뼈마디 곯고 곯았더니라

 

차라리 저 울음 새우는

돔박새 되어

 

넋풀이나마 쏟아낸다면

미음 한 점 풀리기나 할까

 

바람 트는 날

봉오리째 떨어져 눕는 꽃

벌건 돌멩이같은

발굽에 채이는 핏덩이 들꽃.

 

 

                            *혜향문학2024년 상반기(통권 제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