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기아
4월은 한참 멀었는데
겨울이 너무 길었던 걸까
긴기아, 아직은 아닌데 너무 서둘러
꽃대를 밀고 올라와 버린 조급함을 이쩌지
제 계절을 분별하지 못하고 피는 꽃이
어쩌면 좀 부족한 거 같기도 한데
지루한 시간을 확 잡아당겨
하루를 열두 시간으로 한대도 누가 뭐라겠어
아무려면 그것도 너인 걸
애써 봉오리를 밀어 올려도
다 피지 못하는 꽃이 있고
너무 미리 와서 녹아내리는 꽃도 있다
일찍 피려는 마음과 피지 못하는 마음 사이에서
우리는 피어나고
창가의 햇볕은 피지 못하고 움츠린
봉오리로 간다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 미리 와
조그맣게 웃고 있는 꽃을
나의 봄 마당으로 불러들인다, 긴기아
♧ 불빛 정원
목련나무 입구,
아무 계절도 자라지 않는 죽은 숲에
LED 환한 전구들이 일제히 켜졌다
한 꽃마을이 생겼다
가장행렬 하듯 치장하고 일어서는 나신들
뜨겁게 켜지는 심장도 없이
몸속이 밝아지면 곳곳에
허수아비 생명들이 늘어선다 허영에 찬
텅 빈 머리만 세우고
앞만 있고 뒤가 없는
겉만 있고 속이 없는
환한 마당 밖의 일은 나와 상관이 없는 일
죽음보다 더 캄캄해지는
불이 꺼진 후의 일은 접어 두자
매일 죽어야 살아나는 허구의 반복
그 헛것을 위하여 오늘도
어김없이 죽은 생선의 눈,
해시시* LED 불을 밝힌다
뜨거움도 없는 오늘 밤이 들떠있다
밤새껏 쏟아 부어도
타지 않는 밤
아침이면 목련꽃 환하게 피어
허수아비 생명들 주워 올린다
-----
* 해시시(hashish) : 대마초.
♧ 드라이플라워
문이 닫혔다
몸을 수조에 담그고 다그친다
모세혈관을 타고 조여드는 압박
다만 꽃이고자 한다
색깔과 향기와 자태가 절대적인,
이름을 지키는 일
너는 꽃이다
오후 3시 반의 무료한 벽을 장식하는
너를 지키는 마지막 자세
건드리면 부서지더라도
분명한 색깔과 투명한 의지로
너를 증명할 수 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비워 말린다
꽃이 지고 꽃으로 남는다
앉은 자세 그대로
재만 남아도
한 치의 승복도 할 수 없는
죽어도 꽃이다, 박제된
♧ 동백꽃이 송이째 떨어지는 이유
바람이 분다
가려워서 살짝 긁었을 뿐인데
동백꽃이 송이째 떨어진다
손이 건넨 따뜻한 온기가
언 몸을 녹일 수 있겠지만
잘못 회로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
벌레의 입이라고 문질러 막아버린 일
덧난 상처가
벌겋게 독이 되어 피질 줄은 몰랐다
아무리 얕은 가려움이라도
바닥까지 긁어서는 안 되는 일
긁힌 상처는 가만히 엎드린 바닥이 아니다
얼굴을 가리고 일어서는 마음이 있다
살짝 어깨를 받쳐주기만 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데
누워 쉬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면
견디고 있는 눈물까지
빼앗는 것이다
동백꽃은
제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송두리째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 (서정시학, 2024)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항신 시집 '연서戀書'의 시(6) (0) | 2024.09.17 |
---|---|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6) (0) | 2024.09.15 |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5) (1) | 2024.09.13 |
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2) (0) | 2024.09.12 |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의 시(8) (0) | 2024.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