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늙은 작가의 노래 - 강덕환
자기가 본 것, 아는 것만
진리라고 여기며 무리를 지어
장르, 동문, 성씨, 고향
성향단위로 조직을 만들고
여기에 금일봉을 쾌척하여
대표 자리를 맡아 명함에 새겨
선거 때마다 흥정하며
보조금, 광고에 골몰한다
등단연도나 매체를 따져
이러쿵저러쿵 대접받기를 원하고
중앙문단이 어떻다거나
유명 작가와의 인연을
자기 작품의 질과 동일시한다
발표한 작품 권수와 수상경력은
기를 쓰고 프로필에 꼭 집어넣으려하고
다 그런 건 아니라며
시치미를 때는 걸 보면
나 또한 늙었나보다
♧ 사과나무 이야기 - 강동완
우리집 뒤뜰에는 사과나무 한그루가 외롭게 심어져 있어 노을이 지는 저녁 사과나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어둠 속에서 눈물이 흑진주처럼 빛났어
죽은 사람들을 사과나무 밑에 묻는다는 아마존의 어느 부족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 나는 십 년을 같이 살아온 아픈 빨간 왕관앵무새를 우리집 사과나무 밑에 묻었어 너무 외롭게 살다가 죽어간 거지 너무 외로워서 죽은 거지 나만 사랑했으면 하는 욕심 때문에 수컷 앵무새를 사오지 않았어
난 햇살들이 춤을 추는 아침 매일 사과나무에게 말을 걸었어 미안해, 나를 사랑하지, 너도 나를 정말로 사랑하지, 빨간 왕관앵무새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했지
밤이 되면 사과나무는 조개 속 진주처럼 빛났고 반딧불들이 달빛을 입에 물고 모여들었어 흉측한 얼굴을 한 갈색쥐들이 살금살금 사과나무를 피해 돌 틈 사이로 서둘러 사라졌고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길고양이들은 겨드랑이에 발톱을 숨기고 달빛 뒤에 눈을 번쩍이며 숨었어
난 푸른 사과를 먹으면 갑자기 밀려드는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졌어 푸른 사과를 먹고 앵무새의 나라로 구름을 타고 다녀오는 아름다운 꿈을 꾸기도 했지 나의 죽은 빨간 왕관앵무새의 영혼도 수컷 앵무새와 버찌 열매를 나눠 먹으며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고 있네 죽어서도 영원히 행복하여라
나는 가끔 사과나무에 가득 열린 사과 하나가 되고 싶었어 햇살을 툭 건들면 나는 마법처 럼 사과나무에 매달린 사과 열매가 되기도 했지 사랑하는 여인이 나를 매만지며 뚝 따주기를 바라고, 보름달이 뜨면 어린 아이들이 사과나무 주위를 둘러싸고 아름다운 춤을 추기도 했어 그리고 기도를 했지 사과의 푸른 눈동자가 눈먼 아이들의 맑은 눈으로 되길 우울한 아이들의 키가 커지고 누추한 영혼이 어둠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이 되었어
난 사과나무 하나를 사과나무 옆에 더 심었어 외롭게 말라가지 말고 빗방울을 먹으며 풍성한 잎사귀와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기를 바랐어 그리고 서로 영원히 사랑하기를
♧ 누이에게 - 김경훈
누이여
가을 오후의 햇살 같은 누이여
봄부터 여름
그 뜨거웠던 정열이
비로소 가라앉은 늦가을의 오후
감국은 짙노랗게 더욱 불타고
가지마다 귤들은 황금빛 선명하다
먼 길 돌아온 이 가을의 햇살 같은
누이여
연초록 수선화 싹 비로소 올라오고
동백은 겨울맞이 꽃봉오리 물고 있다
미련이나 집착 없이
저마다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서두르거나 조바심치지 않는다
늦가을 오후의 햇살로
애잔하게 빛나는
누이여
거울을 향한 남은 열정
이렇게 살 일이다
♧ 갈대 – 김광렬
성산포 가는 길목
불어오는 바람에
갈대는 운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운다
깊은 물 쪽으로
휩쓸리는
하안 머리칼이
죽기 위해
텀벙텀벙
물속으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 같다
그렇게 물속으로
걸이 들어가서
하얗게
울던 사람이
이 땅 어딘가에는
또 있을 것이다
♧ 러버덕 – 김규중
〈아메리칸 드림 620〉전시회* 아이들이 목욕할 때 갖고 노는 갖고 노는 노란 러버덕
인형 ‘러버덕’들이 길 안내 하듯 전시장 바닥에 줄지어 있다 미국 애리조나의 관세국경보호청에 따르면 미국 멕시코 국경의 사막에서 매년 수많은 러버덕이 발견된다고 한다 길이가 무려 620km에 달하는 ‘죽음의 사막’을 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횡단하는 사람들이 뒤이어 오는 이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러버덕과 같은 밝은 물건들을 이정표로 놓아두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가 디아스포라에게 보내는
노란 희망
1948년 겨울 이 섬에 있으면 다 씨가 없어진다고 해서 씨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네 힘으로 뛰어라 가서 살아라 어머니는 내 등을 밀며 두 번 돌아보지 않고 열일곱 사내의 울음은 사나운 바람에 묻히고 현해탄을 넘는 밀항선 기름통 안에서 거친 파도에 멀미하고 구토하며 체포되거나 침몰하거나 낯선 해안에 도착하거나**
1950년 여름 예비검속 구금 장소는 협소했다 한밤중에 ‘넓은 장소로 간다’고 유인하며 252명에게 생활 소지품들을 챙기고 GMC 트럭 여러 대에 몸을 싣게 했다 동네 마을을 지나 인가가 없는 파도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외진 곳으로 당하자 자신들의 죽음을 직감했는지 신었던 검정 고무신을 벗어 길바닥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죽음이 산 자에게 내미는
검은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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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칸 드림 620〉 전시회는 2022년 제주의 포도뮤지엄에서 이루어졌다.
** 제주문화방송의 ‘일본으로 간 4․3 영혼’(2001년 5월 10일 방송)에 나오는
증언의 일부.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 (통권 제85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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