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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5)

by 김창집1 2024. 9. 13.

 

 

장무상망長毋相忘

 

 

바위는 바위끼리 나무는 나무끼리

 

겹겹이 단을 쌓아 휘는 바람 붙들었다

 

먼 해역 밀려드는 파도, 닿지 않는 소식에

 

때로는 쓸쓸함이 등살처럼 돋아나고

 

머뭇대던 의중에 때 이른 수선의 향기

 

마스크 한 겹 가려도 심중으로 스미던

 

단산 기려 놓는 걸음, 한 획 길게 내리며

 

붓끝에 얹힌 너에게 간절함을 전하는

 

첫 마음 그대로겠지, 산그늘에 스미다

 

 


 

출륙금지령

 

 

  칠흑의 바다 위로 그림자 짙어진다

 

  살길 찾아 나선 뱃길은 안전했을까 금줄 같은 수평선 제주사람 발 묶어둔 감옥 같은 이백여 년 천형의 생을 더해, 군마 전복 해삼 감자 당금귤 한 알에도 매겨지던 세금폭탄, 수탈의 죄를 물어 바람은 쉬지 않고 그토록 몰아쳤을까 읽고 또 읽어 보는 내 안의 바람처럼 저 바다 잠시 떠나도 등줄기 시려오는 붙박이 내 습성도 근본을 알 것 같아 물질로 버틴 세상 어머니 둥근 힘으로 언제나 그 자리 저리 환히 밝히시니

 

  이제 막 당도한 봄이 한 척 배를 끌고 온다

 

 


 

빛 그림자 해변

 

 

일출봉 내 이마 위 한발 떼면 더 멀어져

목젖까지 차오른 숨 이제 차마 뱉었을까

 

터진목 길 터주는 바다

죽어서 오는 사람들

 

물새의 발자국 따라 위로처럼 걷는 해변

하얗게 이는 파도 바람의 말 쏟아낸다

 

그 누굴 만나시려고

여기 다시 오시는지

 

 


 

다시 걷는 바다

 

 

언덕배기 억새 사이 수평선이 가깝다

눈부신 윤슬 위로 펼쳐놓은 캔버스

빠르게 흘려보낸 날 밑그림은 다졌을까

 

날마다 몸 바꾸는 바다 이력 그렇거니와

기일과 생일 뒤섞여 사는 일 전부였던

사계절 곧추세우려 붙잡아둔 마음의 축

 

노동으로 당도하는 해역 만리 파도에

뭉개진 젖은 발가락 포근히 감싸오는

화순리 자갈 같은 말 억세게 다시 핀다

 

 


 

베릿내

 

 

폭포 소리 끌어안고

나를 벼랑에 세우네

 

아득히 발끝 아래

거슬러 온 날이여

 

끝까지 맞서 걷는

쟁쟁한 저 물소리

 

계곡 어디쯤에서

수굿이 잦아들어

 

성천봉 하늘 자락

물빛 건져 올리면

 

때맞춰 내리는 별들

고이 받드네

젖은 두 손에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가히,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