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무상망長毋相忘
바위는 바위끼리 나무는 나무끼리
겹겹이 단을 쌓아 휘는 바람 붙들었다
먼 해역 밀려드는 파도, 닿지 않는 소식에
때로는 쓸쓸함이 등살처럼 돋아나고
머뭇대던 의중에 때 이른 수선의 향기
마스크 한 겹 가려도 심중으로 스미던
단산 기려 놓는 걸음, 한 획 길게 내리며
붓끝에 얹힌 너에게 간절함을 전하는
첫 마음 그대로겠지, 산그늘에 스미다
♧ 출륙금지령
칠흑의 바다 위로 그림자 짙어진다
살길 찾아 나선 뱃길은 안전했을까 금줄 같은 수평선 제주사람 발 묶어둔 감옥 같은 이백여 년 천형의 생을 더해, 군마 전복 해삼 감자 당금귤 한 알에도 매겨지던 세금폭탄, 수탈의 죄를 물어 바람은 쉬지 않고 그토록 몰아쳤을까 읽고 또 읽어 보는 내 안의 바람처럼 저 바다 잠시 떠나도 등줄기 시려오는 붙박이 내 습성도 근본을 알 것 같아 물질로 버틴 세상 어머니 둥근 힘으로 언제나 그 자리 저리 환히 밝히시니
이제 막 당도한 봄이 한 척 배를 끌고 온다
♧ 빛 그림자 해변
일출봉 내 이마 위 한발 떼면 더 멀어져
목젖까지 차오른 숨 이제 차마 뱉었을까
터진목 길 터주는 바다
죽어서 오는 사람들
물새의 발자국 따라 위로처럼 걷는 해변
하얗게 이는 파도 바람의 말 쏟아낸다
그 누굴 만나시려고
여기 다시 오시는지
♧ 다시 걷는 바다
언덕배기 억새 사이 수평선이 가깝다
눈부신 윤슬 위로 펼쳐놓은 캔버스
빠르게 흘려보낸 날 밑그림은 다졌을까
날마다 몸 바꾸는 바다 이력 그렇거니와
기일과 생일 뒤섞여 사는 일 전부였던
사계절 곧추세우려 붙잡아둔 마음의 축
노동으로 당도하는 해역 만리 파도에
뭉개진 젖은 발가락 포근히 감싸오는
화순리 자갈 같은 말 억세게 다시 핀다
♧ 베릿내
폭포 소리 끌어안고
나를 벼랑에 세우네
아득히 발끝 아래
거슬러 온 날이여
끝까지 맞서 걷는
쟁쟁한 저 물소리
계곡 어디쯤에서
수굿이 잦아들어
성천봉 하늘 자락
물빛 건져 올리면
때맞춰 내리는 별들
고이 받드네
젖은 두 손에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 (가히,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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