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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2)

by 김창집1 2024. 9. 12.

 

 

아버지의 부탁 - 한상호

 

 

몇 번이나

마른기침 하시더니

창 밖 저 쪽에다 눈길 주며

, 던지듯 하신 부탁

 

구십이 다 되어서야 하신

그리도 힘든 부탁

 

발톱 좀 깎아 주겠느냐

 

 


 

기도 허기원

 

 

바람결에 휘날리는 갈대처럼

부딪치며 살지라도

위선보다 진실을 위해

다듬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주세요

 

가랑비에 떨어지는 한 가닥 꽃잎일지라도

이 몸이 사랑하는 마음 안에

따뜻한 가슴으로 포옹하게 해 주세요

 

아름다운 님이시여 !

그렇게 되게 해 주세요

 

앞에 강해지는 내가 되게 해 주세요

밤마다 견디기 힘든 고독 속에 묻혀 살지라도

사랑 앞에 무릎 꿇고 낮아지는

항상 겸허한 마음으로 그렇게 살게 해 주세요

 

아름다운 님이시여 !

소유가 아닌 빈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무소유

받아서 채워지는 어리석은 야심보다

주어서 비워지는 보시하는 자비 안에

환희의 기쁜 눈물을 흩뿌리게 하소서

 

지금까지 해왔던 내 사랑에 들보가 있었다면

용서와 더불어

앞으로 해 나갈 내 사랑은

맑게 반짝이며

아름다운

별빛 윤슬 위에

흐르는 강물이게 해 주세요

 

아름다운 님이시여!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나이다

 

 


 

눈은 내리고 - 권순자

 

 

눈은 내리고

몸은 살아서

몸살을 앓고

 

눈이 내리고

너는 내 안에 살아서

가슴이 시리고

 

애간장이 타서

눈 덮인 거리를

휘돌 때

배고픈 새는 눈발을 해치며

운다

 

아플수록 환해지는

겨울 저녁

 

 


 

스웨터 푸는 법 김나비

 

 

그때 우리는 오래된 스웨터였다

드문드문 감정의 코가 빠져 있고

어긋난 말들은 서로를 향해 보풀처럼 뭉쳐 있었다

 

꼬불거리는 실처럼

구부러진 엄마가 눈만 껌뻑이며 창문을 바라봤다

창 위로 끊어진 실밥 같은 눈이 툭툭 떨어졌다

 

우리는 저글링하듯 돌아가며 대바늘을 잡았다

엄마를 앉혀 놓고 밤새 해진 옷을 떴고

옷은 모양이 갖춰져 갔다

 

반복적으로 직조되는 것은 견고해 보였으나

슬쩍 잡아당기면 쉽게 풀어졌다

사과를 든 마녀가 밤의 창가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누가 먼저 베어 먹을까

한 입씩 돌려가며 먹자고 누군가 말했다

실뭉치를 던지고 사과를 잡아채는 오빠

 

어둠이 물러갔을 때

뼈만 남은 사과에 이 자국이 피멍처럼 찍혀 있었고

스웨터는 찢긴 채 바닥에 뒹굴었다

눈 위에 쪼그라든 발자국이 가득했다

 

모든 것이 겨울의 일

낡은 스웨터 끝을 풀어 주전자에 걸고 김을 쐰다

꼬불거리던 실주름이 사라진다

 

 


 

튤립 오명현

 

 

직동근린공원에 카드 섹션이 한창이다

일사불란

오와 열은 나무랄 데 없고

구역 간 경계는

번지별로 다르게 채색된 지적도처럼 엄격하다

 

남의 땅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은 자 누구인가

느낌표일까 물음표일까

어쩌다가 엉뚱한 색깔의 카드를 들어올린 이가 있다

 

쾌활한 반동에 자아비판은 없다

4!

춘곤증은 무죄다

 

 

                            *월간 우리9월호(통권 제43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