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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3)

by 김창집1 2024. 9. 14.

 

 

긴기아

 

 

4월은 한참 멀었는데

겨울이 너무 길었던 걸까

긴기아, 아직은 아닌데 너무 서둘러

꽃대를 밀고 올라와 버린 조급함을 이쩌지

제 계절을 분별하지 못하고 피는 꽃이

어쩌면 좀 부족한 거 같기도 한데

 

지루한 시간을 확 잡아당겨

하루를 열두 시간으로 한대도 누가 뭐라겠어

아무려면 그것도 너인 걸

 

애써 봉오리를 밀어 올려도

다 피지 못하는 꽃이 있고

너무 미리 와서 녹아내리는 꽃도 있다

 

일찍 피려는 마음과 피지 못하는 마음 사이에서

우리는 피어나고

창가의 햇볕은 피지 못하고 움츠린

봉오리로 간다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 미리 와

조그맣게 웃고 있는 꽃을

나의 봄 마당으로 불러들인다, 긴기아

 

 


 

불빛 정원

 

 

목련나무 입구,

아무 계절도 자라지 않는 죽은 숲에

LED 환한 전구들이 일제히 켜졌다

 

한 꽃마을이 생겼다

 

가장행렬 하듯 치장하고 일어서는 나신들

뜨겁게 켜지는 심장도 없이

몸속이 밝아지면 곳곳에

허수아비 생명들이 늘어선다 허영에 찬

텅 빈 머리만 세우고

 

앞만 있고 뒤가 없는

겉만 있고 속이 없는

 

환한 마당 밖의 일은 나와 상관이 없는 일

죽음보다 더 캄캄해지는

불이 꺼진 후의 일은 접어 두자

 

매일 죽어야 살아나는 허구의 반복

그 헛것을 위하여 오늘도

어김없이 죽은 생선의 눈,

해시시* LED 불을 밝힌다

 

뜨거움도 없는 오늘 밤이 들떠있다

밤새껏 쏟아 부어도

타지 않는 밤

 

아침이면 목련꽃 환하게 피어

허수아비 생명들 주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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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시시(hashish) : 대마초.

 

 


 

드라이플라워

 

 

문이 닫혔다

 

몸을 수조에 담그고 다그친다

 

모세혈관을 타고 조여드는 압박

다만 꽃이고자 한다

 

색깔과 향기와 자태가 절대적인,

이름을 지키는 일

 

너는 꽃이다

 

오후 3시 반의 무료한 벽을 장식하는

너를 지키는 마지막 자세

 

건드리면 부서지더라도

분명한 색깔과 투명한 의지로

너를 증명할 수 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비워 말린다

 

꽃이 지고 꽃으로 남는다

 

앉은 자세 그대로

재만 남아도

 

한 치의 승복도 할 수 없는

 

죽어도 꽃이다, 박제된

 

 


 

동백꽃이 송이째 떨어지는 이유

 

 

바람이 분다

 

가려워서 살짝 긁었을 뿐인데

동백꽃이 송이째 떨어진다

 

손이 건넨 따뜻한 온기가

언 몸을 녹일 수 있겠지만

잘못 회로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

 

벌레의 입이라고 문질러 막아버린 일

 

덧난 상처가

벌겋게 독이 되어 피질 줄은 몰랐다

아무리 얕은 가려움이라도

바닥까지 긁어서는 안 되는 일

 

긁힌 상처는 가만히 엎드린 바닥이 아니다

 

얼굴을 가리고 일어서는 마음이 있다

 

살짝 어깨를 받쳐주기만 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데

누워 쉬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면

견디고 있는 눈물까지

빼앗는 것이다

 

동백꽃은

제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송두리째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서정시학,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