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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의 시(9)

by 김창집1 2024. 9. 23.

 

 

아프리카 펭귄

 

 

38도 땡볕 아래 어미 한번 아비 한 번

 

볼더스 비치 모래밭에 숙명이듯 알을 품는

 

어미의 붉은 목젖이 무릎을 꿇게 한다

 

울 엄마도 한여름에 나를 저리 품었었지

 

숨넘어가는 산통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세상의 첫 울음소리, 그 소리 때문이었지

 

 


 

구피*의 하루

 

 

온종일 어항 속

태평양을 건너듯

출구 없는 레일 위를 돌리고 돌려도

또다시 제자리걸음 오늘이 갇혀 있다

 

한때는 내 어머니도 종종걸음치셨지

한여름 용천수에 발 한번 담글 새 없이

움푹 팬 발자국들은 어머니의 길이다

 

저들도 속수무책,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저출산 막대그래프 눈금을 채워가듯

새끼들 한 달이 멀다, 수 싸움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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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피 : 열대어.

 

 


 

야학의 꿈

 

 

죽지 안허난 살았주

아이고 목숨도 질경

 

우리 어멍 학교 보내줍네까

아덜덜만 시켰주

 

어쩌다 밤 야학 강 오민

막 때리곡 협데다*

 

전생에 소로 못 나면

여자로 태어난다던

 

어머니 받침 틀린

글자들이 흘림체로 흘려

 

못다 쓴 소설책 종장

채워가는 중이다

 

---

*채록집 여성의 기억중 수산리 양○○(98) 님의 구술 일부.

 

 


 

시대변천사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키웠었지

앞치마 두르고 설거지하는 아들을 보며

돌아와 한숨 못 잤다고

푸념하던 옆집 엄마

 

그런 시절 있었지, 가부장적 시대론

출세를 내세우며 책상 위에 앉혀 놓고

맹목적 내리사랑으로

등 떠밀던 어머니

 

강산이 몇 번째 바뀌더니 너도나도

퇴근하면 달려가 집안일 분담해야 하는

진즉에 그랬어야 했어,

공평한 세상이지

 

 


 

당신堂神을 찾던 당신

    -해안동, 동당

 

 

누구의 손길이었나 근원을 찾던 발길

미끄덩 넘어지며 무심의 단죄를 받듯

풀더미 허리 헤치며 길 없는 길을 간다

 

아침 이슬 밟으며 당신堂神을 찾던 당신

지성으로 빌었던 간절함도 녹이 슬어

다 식은 제단 둘레에 표지석 하나 없는

 

당신堂神은 거기 있는데 당신은 거기 없고

덩그러니 하늘로 손 내밀던 팽나무 아래

해안동 하르방당에 상사화꽃 피었다

 

 

                      * 장영춘 시집 달그락, (한그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