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4)와 감

by 김창집1 2024. 9. 25.

 

 

여름밤, 여름비 - 김종욱

 

 

여름날, 여름빛

 

능소화가 지듯이

깨끗이 한꺼번에 져 버리는

 

날과 빛이 다 어제 같구나

 

그러나 마음에는 썼다

 

내겐 가장 달콤한 너의 웃음은

 

검은 것들이 반짝이기 시작하며

 

번뜩이는 어둠 속 고혹한 자맥질,

날카로운 비명의 수심,

애수의 박자와 선율은

비에 젖어 일어나지 못하는 나비, , 어둠

사선으로 칼날을 세우는

잎사귀라는 소름

그 유한한 연주, 그리고 나의 춤

뒤집혀버려 빛나는 검푸른

 

여름비여름밤

 

후두둑 두들기는

어둠의

리듬

 

 


 

노동가 - 박태근

 

 

가자 가

오늘도 일하러 가자

밤새 그려 본 도면

뜯었다 붙였다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

거치적거림 없이 착착 휘어감은

온기 생기 돋은 집

밤새 머릿속으로 연습했으면 일하러 가세

 

우지직 뜯어 젖혀

산뜻한 자재 제자리에 찾아 세우고

도취된 근성으로 손들 맞대어

섞어 가며 뚝딱뚝딱 일들 하세나

헌 집 가고 새 집 만들어

! 똑소리 나도록

끝내주게 꾸며들 보세

우리 꾼들아!

흐으응

 

 


 

다 버리고 간다 - 송준규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려야 한다 생에 마지막이 될 열다섯 번째 이사 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대단지 신축아파트에 걸맞지 않는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김치냉장고, 선풍기, 자전거, 서랍장, 책장 모두 버려야 한다 오랫동안 정들고, 손때 묻은 것들이다 또 자주 신지 않는 신발, 이 년 이상 입지 않는 옷들도 다 버리란다 잘 버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고, 버리는 것이 인테리어란다. 가난했던 유년의 검소함이 몸에 배어 버리지 못하는 탓에 아내가 몰래 버린 걸 다시 주워 들여오던 지난날 돌아보며 묵은 짐들을 뒤진다. 십 년 이십 년 된 옷들이 한가득이고, 신발장엔 아끼느라 신지 않은 신발들 밑창이 푸석푸석 으스러진다. 마지막에 또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서야 이삿짐이 마무리된다 이렇게 껴안고 있었던 건 추억 때문인가, 미련 덩어리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집착이었나, 탐욕이었을까 스스로에게 물으며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노래한 박경리 선생을 떠올려 본다.

 

 


 

붉은머리오목눈이 여연

 

 

그의 눈빛이 심장을 찌른다

두 팔은 높은 곳을 향하고

열망은 앞으로 뻗어 있다

천상의 비책을 품은

달콤한 미소에 감춰진 비밀

시간을 멈추게 만든다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

꿈틀거리는 불꽃같은 가슴에

열정을 안고 끝없는 여정을 떠날 예정

탁구공 같은 몸뚱어리로

몇 배나 큰 원수의 자식을 품어 키우고

살뜰히 떠나보낸 이별의 날에

나는 세상을 모른다 말하리

 

 


 

디딤돌 - 위인환

 

 

거북이 등껍질 같은

아버지 등에

하안 꽃이 피었다

 

헛발질에 짓밟혀

갈라지고 터져

화석이 된 등

 

무쇠 같은 아버지

하루가 부족하도록 땅을 파다

뼈가 드러나도 웃으셨다

 

별빛 내리는 밤이면

선정해 둔 별자리 찾을 날

헤아리고 있다.

 

 

                                   *월간 우리9월호(통권 43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