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방울 시 – 김선순
언제 이런 나이가 되었나
더금더금 나도 몰랐다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보이지 않는 마음을 키우고
보이지 않게 자란 마음은
물방울만큼 새겨진 상처에
기대어 살아가는 법을 일러 주었다
무거워 헐떡이던 어제가
더 더 찬란을 꿈꾸는 내일이
선물처럼 펼쳐지는 오늘 앞에 침묵이다
달이 비치는 물방울
어둠으로 빛나는 찰나
어제가 되어가는 오늘을 눈부시게
내일이 찬란하게 오늘을 껴안는다
♧ 자유에 대해 – 김세형
이 전쟁은 우와 좌의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인간과 짐승과의 전쟁이다.
개인과 떼와의 전쟁이다.
당신은 고독한
그러나 자유한 인간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떼로부터 탈출하라.
떼쓰는 떼로부터 벗어나 고독한 자신과 마주하라.
잃어버린 자신과 함께하라.
거기에 자유가 있나니-
거기에 인간이 있나니-
♧ 가을夢(몽) - 김은옥
새털구름 따라 마음이 흘러간다
마음 떠나보낸 눈동자 조리개 속 창문 너머로
금붕어 떼 물결치며 노을이 가득 밀려오고 있다
창을 닫지 못한 빈 몸이 자리에 눕는다
삭막해진 내 숨결들이
뾰족한 잠을 밤새 둥글게 다듬고 있다
창밖이 수선스럽다
아파트 창문들이 하나둘 피돌기를 하는 중이다
사방 가득 늦둥이들이 울긋불긋 먹음직스럽다
붉은 것들을 무진장 베어 먹는다
육즙을 뚝뚝 흘리며 차오르는 피
가을 살점 비린내 아침 하늘에 가득하다
♧ 붉은 가을날에 – 김정서
그리움이 나리는데
온 산 가득 나리는데
나는 누른 냄새를 맡으며 걸었네
가을의 음성을 들으며 하염없이 걸었네
저녁 해 붉은 숨이 산등성이 비껴갈 때
모퉁이 단풍잎도 붉게붉게 나리는데
어둠이 젖어 올라 경계를 지웠을 때
열엿새 깊은 달도 단풍들 듯 붉으네
♧ 대설주의보 – 오명현
아침까지도 하늘은 찌뿌둥하기만 하고
가는 눈발조차 없는 것이
대설주의보는 완전히 빗나갔다
길에는 밤새 구청 공무원들이
염화칼슘을 무더기무더기 쏟아 놓았다
우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면서
염화칼슘을 쓸어 담는다
옆집 김 씨는
눈인 줄 알고 밟아 대는 길고양이들의 발바닥이 얼마나 쓰리겠냐며 쓸어 담고
아내는
나중에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쓸어 담고
나는
승용차 하부 철판에 녹이 슬어 차가 남아나겠느냐며
쓸어 담는다
*월간 『우리詩』 9월호(통권 제435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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