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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5)

by 김창집1 2024. 9. 27.

 

 

그가 나를 물어뜯었다 이기헌

 

 

지독하게도 물어뜯었다

나의 내면에 감추어진

추잡한 기억들을 몽땅 파헤쳤다

쓰레기봉투에 은밀히 담아

남모르게 버리려 했던 비밀들을

철저하게 들추어냈다

지칠 줄 모르는 끈기로

집요하게 달려들어서는

나의 치부를 모조리 까발려 놓았다

지난밤 꿈자리가 사납더니

밤새도록 끈질기게도 달려들었다

그렇게 온 동네 창피를 주고

녀석은 담벼락 위에 태연히 앉아

당황하는 나를 지긋이 내려다본다

부끄러움은 오로지 나의 몫,

처참하게 흐트러진 마음을

누가 볼까 서둘러 추스른다

 

 

*렘브란트의 '예수'


 

등불 - 이인평

 

 

기도

마음이 어둠인지를 본다

몸 안에 빛이 있는지를

빛인지 어둠인지

안과 밖을 보는 눈이 성한지를

손 모아 살핀다

 

대낮에도 어둠인 몸

한밤중에도 빛인 몸

 

눈이 맑아야 마음이 환한

마태오 복음 622*

등불을 새로 켠다

 

드디어 보인다

그분을 보는 눈이다

마음이 열려 몸이 환하다

등불인 그분이

밤낮으로 흔들리는 나를

비춘다

 

---

* 눈은 몸의 등불이다.

 

 


 

감별법鑑別法 - 오명현

 

 

리아유치원 졸업반 하연재에게 함미는 묻는다

 

맨날,

연재 잠들고 나면 밤늦게 들어오시고

쉬는 날에는 피곤타며 낮잠만 주무시는

아빠는 동네 아저씬가?

 

함미! 그럼 아빠는 가짠가?

근데 엄마 결혼식 사진에 아빠가 나와 있거든!

아마 진짜 아빠가 맞나 봐!

 

 


 

남산동 이야기 이동훈

 

 

남산동 언덕에 올라서면 씨 뿌리는 사람 있을까요.

오래건 논밭은 사라지고 없는데

남문시장, 자동차 부속품 거리, 인쇄골목에서

생업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모여 살지요.

시인은 씨 뿌리는 사람이고, 씨는 봄을 부르는 거라고

남산동 인쇄골목에 생가를 둔 백기만이 그랬답니다.

 

대구읍성 남쪽 자리 그 건너 나지막한 언덕

이육사 형제가 이곳에 이사 왔을 때 교남학교도 옮겨 왔다죠.

1926, 육사의 동생 원조가 교남학교를 다닐 무렵

음성 서쪽에서 온 이상화는 남산 언덕을 지나 앞산까지 오가며

빼앗긴 들에 봄, 봄을 꿈꾸는 절창을 짓지요.

교남학교 교사가 되어 시 대신 주먹 쓰는 법도 가르쳤고요.

봄을 함께 꿈꾸다가 대구형무소에 갇힌 이육사는

남산 밑을 지나는 시냇물 소리에 귀를 내주며

마침내 바다 가는 새이고 싶었던 그야말로 황혼의 빛인 게지요.

 

1929, 골방에 엎드려 금붕어를 그리던 이장희

숨 쉴 어항을 찾아 남산동 여관 문을 두드리다가

오상순이 집을 비운 걸 알고 어깨를 떨며 돌아섰다지요.

고양이 눈동자 속, 미친 봄의 불길로 그예 사라지고 만 것이죠.

이장희도 가고 이상화도 없는 1951

버드나무 줄기처럼 흔들리던 백기만은

두 친구의 삶과 예술을 책 한 권으로 엮고서야

인생보다 예술이 긴 것에 대해서 비로소 안도했답니다.

그 해, 상화와 고월의 첫 자를 딴 상고예술학원이

교남학교 떠냔 그 언덕 바로 그 자리에 들어서니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통에 문예부흥을 이룩한 셈이랄까요.

 

남산동 향교 건너편 말대가리집을 알까요.

상고예술학원 강사이기도 한 마해송, 조지훈, 구상, 최정희 등이

막걸리로 피난지의 근심을 잊던 곳이라죠.

지난 술집, 떠난 사람, 흔적을 더듬기 어려운데

향교 뒤편으로 자리를 옮긴 도루메기집만 지금껏 대폿술의 향수를 달래주지요.

향교를 지나던 전상렬이 전봇대와 시비가 붙어 손가락이 골절되었다든지

남산동 비탈길에 미끄러지며 레코드판 조각에 눈을 다친 신동집이

그때부터 색안경을 쓰게 되었다든지 하는 얘기가 전설처럼 떠돕니다.

 

남산동은 무당이 많아 무당골로 불렸다지요.

언덕 한 쪽에 보현사가 있고, 어깨를 맞추어 남산교회가 있답니다.

그 아래 관덕정 마당은 동학 교주 최제우가 순교한 천도교 성지요

천주교 신자가 다수 희생된 천주교 성지이기도 해요.

종교의 회합장 같은 이곳을 뒷배처럼 봐 주는

성모당 일대의 경건한 분위기도 좋지만 그곳의 굴참나무 고목은 더 좋아요.

성모당 옆문에 대다시피 해서 전태일이 살던 집이 있지요.

1963, 전태일이 책보 메고 일 년 남짓 다녔다는

야간 청옥공민학교는 지금의 명덕초등학교를 빌려 쓴 것이랍니다.

한 번은 따라 걸어보면 좋을 거예요.

뒷날 노동 평등의 씨를 뿌리게 될 청년이 걸었던 길을 말이죠.

 

남산동 언덕의 씨 뿌린 사람을 보았을까요.

이곳 헌책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책을 너무 읽어 해고되었다는

장정일 같은 이도 책으로 농사지은 사람일 테지요.

두어 점포만 시늉으로 남은 헌책방에 들렀다면

시장 보리밥이나 납작만두나 돼지국밥으로 요기가 되었다면

굴참나무 아래로, 은행나무 그늘로 종일 헤매도 좋겠어요.

그 옛날 이상화처럼 다리에 피로가 쌓일 때면

향교 도루메기집의 대포 한 간은 사양치 마시고요.

야윈 몸에도 대포 아홉 잔은 거뜬했다는 이육사도 있으니까요.

대포 한 간에 꽃잎 한 잎 피어날 테니

어쩜, 거기 남산동 봄을 만날 수도 있겠습니다.

 

 

                            *월간 우리9월호(통권 제43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