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5)

by 김창집1 2024. 9. 26.

 

 

민들레처럼

 

 

아무데나 빗줄기가 스며드는 곳이면

보따리를 풀고

건조한 바람에 실려 온 고단한 몸을 부렸다

얼마나 깊이 내려가야 발이 닿을지

닫힌 문 앞에 마냥

서 있었다

 

관절마다 갈퀴 같은 옹이박이고

텅 빈 뱃속을 드러낸 팽나무가

속절없이 예각으로 기울 때에도

나 여기 끄떡없이

서 있었다

 

강물은 깊어 돌을 굴리지 못하고

온몸으로 쓰다듬고 지나가지만

왔던 길을 뒤 돌아보지 않는다

 

어스름 땅에 납작하게 붙어

도도하게 하늘 향해 주먹 내지를 때

뿌리는

묵묵히 깊은 우물물을 길었다

 

내 몸이 긴 그림자 비울 때

 

둥근 바람을 받아 날기 위해

깃을 팽팽하게 세우고

처음부터 나 여기

꿋꿋이 서 있었다

 

 


 

위험한 집

 

 

새는 두 칸의 집을 짓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집을 지었다

 

새는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을 때 집을 짓는다

언제 지었는지

나무 꼭대기에 덩그러니 집 한 채 올려져 있었다

 

허공에 방한 칸 지니기 위해

수없이 날아 작은 나뭇가지를 물어 올렸다

 

수리하고 덧댄 바람벽에 알을 낳고

새끼가 다 자라 날아오를 때까지

비가 와도 눈보라가 쳐도

누가 지어준

더 좋은 집을 찾지 않았다

 

은빛 높은 가지 위에 눈이 내렸다

떠날 때도 새는

 

그 집을 허물어버리지 않았다

 

 


 

누룽지 카페

 

 

커피 한 잔으로 서둘러 떠나기도 하지만

오래 그곳에 머물기도 했다

 

일부러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곳을 찾아

단골이 되었다면 익숙해져

군불 땐 아랫목 같은 한 자리 차지하고

종일 자연스레 공부를 즐겼다

 

아무 눈치 보지 않고 진득하게

눌러앉을 수 있다는 것은 능력이다

엉덩이가 뜨겁게 눌어붙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일종의 금지에 가깝다

 

바싹한 누룽지가 되기 위해선

천천히 눌어붙도록 앉아 있어야 한다

 

눌어붙어 무거워진 마음을

퉁퉁 불려 부드럽게 익혔다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즈음이면

가마솥에서 오래 익은

누룽지의 구수한 향기가 몸에 배어

향기 나는 사람이 됐다

 

누구에겐가 필요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뒤로 하고

경계를 넘어야 했다

 

한 자리에서 오래오래

시간을 묵혀야 했다

 

 


 

중랑천 검은 잉어들

 

 

몸뚱어리가 퉁퉁 부어올랐다

이미 검은 강에 물들어

던져주는 먹이를 먹고 시커멓게 자랐다

뻐끔뻐끔 입을 벌리고 모여든다

검은 잉어들

 

하늘에서 떨어지는 선물이

장난삼아 던져준 모이였음을 알까

혀의 돌기에 간사한 기억을 포장하여

매번 다시 끌어당긴다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서로 몸을 부딪치며 쟁탈전이 벌어지고

곡에도 아니면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히는 맹목

 

자신을 다 탕진하고서야

해어 나올 수 없는 심연이거나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늪과도 같다는 걸 알까

 

손아귀에 먹이를 쥐고 던져주는

개의 훈련법이 아무 데서나 난무한다

저 손에 잘못 길들고 있다

 

잘못, 맛 들이고 있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서정시학,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