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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9)

by 김창집1 2024. 10. 4.

 

 

벚꽃 지는 날 오광석

 

 

벚꽃잎이 떨어지는 긴

다시 봄이 지는 거

돌아온 사월이 저물어 가는 거

떨어지는 꽃잎들을 맞으며

뛰노는 아이들이 좀 더 자라는 거

바라보는 눈가에

주름이 자라는 거

 

벚꽃이 피고 질 때마다

꿈도 잠시 피었다 저물어 간다

떨어질 때마다

꿈들이 떨어져 나가는 사월

아이들의 맑은 얼굴에

시간의 그늘이 조금씩 드리워진다

 

나무를 흔들어 꽃잎을 떨어뜨리는

아이들을 막아선다

아직은 꽃이 지면 안 돼

설익은 열매가 나고 나면

잊혀가는 사월이 되면 안 돼

사월이 지나고 나면

훌쩍훌쩍 커버린 키에

쪼그라드는 꿈들이 달려

잊혀가는 시절로 남으면 안 돼

 

호린 하늘에서 봄비가 내린다

떨어지는 꽃잎들이 씻겨 내려간다

비를 피하려 집으로 뛰어가는 아이들이

뒤돌아보며 웃는다

난 벚꽃을 지키려 비를 맞고 서 있다

 

 


 

La chanson de NamWon 남원별곡 - 오세진

 

 

La jeune fille est dans la mer 소녀가 바다에 있다

Le bambou est sur montagne 대나무가 산에 있다

La jeune fille se couche 소녀가 눕는다

Le bambou se couche 대나무가 눕는다

La jeune fille est chair 소녀는 살

Le bambou est la lance 대나무는 창

La jeune fille donne du sang 소녀는 피를 준다

Le bambou mange le sang 대나무는 피를 먹는다

La jeune fille mange le bambou 소녀는 대나무를 먹는다

Le bambou pousse en mangeant le sang 대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La jeune fille grandit en mangeant bambou 소녀는 대나무를 먹고 자란다

Le bambou n'est sur la montagne 대나무가 산에 없다

La jeune fille n'est dans la mer 소녀가 바다에 없다

 

 



코마 5 이정은

 

 

조금 더 익숙해진다면

 

웅크리고 앉았지만 누워있는 듯

 

워드 치는 소리가 달려온다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이런 걸까요

 

한글파일과 미네소타 사이에서

 

약 한 알 먹어요

   기억은 생생합니다 이해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약 두 알 먹이요

   화장실에서 좌변기 뚜껑을 열어요 얼굴이 둥둥 떠 있어요

   다시 잠들 수가 없어요

 

약 세 알 먹어요

   장소가 왜곡되었다고 해요 미네소타가 아니라

   보스톤에서 분만하였습니다 진단서를 보세요

   경찰이 오고 의사가 동의하였습니다

 

통증의 그래프는 극대화되었고

 

1 hate woman

 

진통제는 천사

 

딸을 낳았다 합니다

 

첫 아이는 자궁 안에서 사라졌는데

 

나는 이해가 되었을까요

 

#

 

@이해한다는 것

재발되기

싫어하는 가여운 약입니다

 

 


 

토끼의 밤 - 현택훈

 

 

갓길 풀밭에 달빛이 뛰어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토끼 눈처럼 벌건 자동차 불빛이 지나간다.

이 산을 넘지 못한 토끼는 오래된 굴을 찾는다.

이야기는 늘 산이나 하늘에서 시작되었다.

달빛이 덜그럭거리기에 자정에 이르러

참 못 이룬 전화도 오곤 하는데

청명 무렵 달이 꽤 따뜻해서

택배 상자를 끌어안고 운 밤이 있다.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천운으로 살아왔는데

날이 저물면 발자국도 희미해지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기슭에 이르면 울음도 깊어져

세상 노래는 다 단말마인 건지

안부를 묻는 외사촌 형이 말끝을 흐릴 때

밤바람 부는 은성빌라 유리창은

깊은 밤 엘리베이터처럼 차가웠었지.

산꼭대기 쪽으로 토끼 귀처럼 긴 마을

오르면 암자도 기암도 귀를 세우는 비탈

창밖엔 달처럼 가깝지만 먼

버스정류장이 힘없이 귀를 세운다.

 

 

                        *계간 제주작가여름호(통권 제8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