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경오리는 북경에서 오지 않는다
북쪽 하늘이 덩 비었다
어디로 다 날아갔을까
여기 한 마리, 두 마리가 날아와 앉았는데
무리에서 떨어지면 찾을까
그냥 버려지는 것일까
의문부호처럼 접시에 엎드렸다
속이 타 간이 오그라들고 껍질까지 바싹 굽혔다
운명은 사육되고 날개는 퇴화하여 살진 새
고개를 들면 환한 북쪽
하늘은 그저 북쪽만 가리키는 방향이었다
그래서 고향이 밀리 있다는 걸 알았다
거기서 태어나지 않아도 고향
태생이 어딘지 몰라도 모두 북경오리
주둥이가 붉은지 노란지
지방색이 드러날 털 색깔이 무엇이었는지
북경오리는
북경에서 오지 않는다
이름을 포장한 요리들
가장 먼저 혀에 닿는,
그 맛이 원조로 기억된다
♧ 나도풍란
조난당한 너는
위태로운 바위에 뿌리 얹어
간신히 발붙이고
목숨 한 간 버틴다
몸보다 긴 꽃대로
노를 저으면서
생계를 떠메는 무게를 받쳐 든다
제 발소리 듣고 혼자 크는
아기 발바닥만 한 잎,
시린 발목으로 허공을 향해 걷는다
공중에 걸린 뿌리 흔들지 않으려고
발자국 무늬를 그린다
어느 바람 타고 흘러왔는지
두려움을 떨치고 가야 하는 길
꽃대에 돛을 올리고
먼 바다로 힘껏 한 번 해쳐가 봤으면
바위에 발가락 길게
닻처럼 드리우고
해안선을 따라
끝없는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다
♧ 동굴 속 분홍 물고기*
사람들이
검은 바다에 물결같이 뛰어든다
잠시 출렁이다가 잠잠해지는 수면 위
홀로 해엄치고 있는 분홍 물고기를 본다
2호선 동굴 순환선을 따라
길의 꼬리를 물고 도는
천년을 홀로 수행하는 용천동굴의 물고기
가늠할 수 없는 맞은편을 향하여
먼지가 일어나는 남루한 눈길
아무도 눈 맞추지 않고
손바닥만 한 네모의 방에 면벽하면
누가 곁에 있어도 혼자다
어깨를 감싸 줄 낯익은 얼굴 같아 돌아봐도
비릿한 냄새가 밴 자리에
눈을 감고 줄지어 앉은 퇴화한 눈들이
연어 비늘처럼 일어난다
동굴을 따라 도는 힘으로
철커덕 경전의 한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사람들은 정확히
진도에 따라 열고 닫히는 문을 통과한다
무수히 쏟아내는 저 행적을
출렁이는 물결에 지우고 마는 동굴 속 물고기
어둠 속에서 어둠까지 지우며
아무것도 기록에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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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용천동굴 호수에 있는 희귀한 이류. 피부는 멜라닌 색소가 적어 옅은 분홍색으로 투명하다.
♧ 고지의 정류소
산엔 눈이 내리고
여긴 꽃이 핀다
오르지 않고서는 고지에 닿지 못한다
먼 눈빛으로는 알 수 없는 곳
산 위에서 사람들은 겨울을 걸어 내려왔다
중턱에서 오래 머무는 구름은
늘 겨울을 본다
나는 산 아래서 꽃을 보고
겨울을 보기 위해 멀리서
고지를 경유하는 버스를 탄다
창밖은 겨울, 순간순간이 지나간다
새들의 날개에 봄을 실어보지만
바람이 움켜쥐고 있는 나뭇가지에
빈 새집만 덩그렇다
과거는 현재 속에 있다
지나간 것 같지만 그대로 있다
무릎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내려왔을 때
아이젠 한쪽이 달아났고
까마귀 울어대던 고지의 정류소에
까맣게 하늘을 뒤덮고 눈이 쏟아졌다
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길이 끊긴 고지에
봄은 한참이나 멀리 있었다
그때도 여전히
산 아래에서 보면
눈구름 위 하늘은 푸르렀고
여기 동백꽃은 붉었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 (서정시학,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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