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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6)

by 김창집1 2024. 10. 3.

 

 

북경오리는 북경에서 오지 않는다

 

 

북쪽 하늘이 덩 비었다

 

어디로 다 날아갔을까

여기 한 마리, 두 마리가 날아와 앉았는데

 

무리에서 떨어지면 찾을까

그냥 버려지는 것일까

의문부호처럼 접시에 엎드렸다

속이 타 간이 오그라들고 껍질까지 바싹 굽혔다

 

운명은 사육되고 날개는 퇴화하여 살진 새

고개를 들면 환한 북쪽

하늘은 그저 북쪽만 가리키는 방향이었다

 

그래서 고향이 밀리 있다는 걸 알았다

거기서 태어나지 않아도 고향

 

태생이 어딘지 몰라도 모두 북경오리

주둥이가 붉은지 노란지

 

지방색이 드러날 털 색깔이 무엇이었는지

북경오리는

북경에서 오지 않는다

 

이름을 포장한 요리들

 

가장 먼저 혀에 닿는,

그 맛이 원조로 기억된다

 

 


 

나도풍란

 

 

조난당한 너는

위태로운 바위에 뿌리 얹어

간신히 발붙이고

목숨 한 간 버틴다

 

몸보다 긴 꽃대로

노를 저으면서

생계를 떠메는 무게를 받쳐 든다

 

제 발소리 듣고 혼자 크는

아기 발바닥만 한 잎,

시린 발목으로 허공을 향해 걷는다

공중에 걸린 뿌리 흔들지 않으려고

발자국 무늬를 그린다

 

어느 바람 타고 흘러왔는지

 

두려움을 떨치고 가야 하는 길

꽃대에 돛을 올리고

먼 바다로 힘껏 한 번 해쳐가 봤으면

바위에 발가락 길게

닻처럼 드리우고

해안선을 따라

 

끝없는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다

 

 


 

동굴 속 분홍 물고기*

 

 

사람들이

검은 바다에 물결같이 뛰어든다

 

잠시 출렁이다가 잠잠해지는 수면 위

홀로 해엄치고 있는 분홍 물고기를 본다

 

2호선 동굴 순환선을 따라

길의 꼬리를 물고 도는

천년을 홀로 수행하는 용천동굴의 물고기

 

가늠할 수 없는 맞은편을 향하여

먼지가 일어나는 남루한 눈길

아무도 눈 맞추지 않고

손바닥만 한 네모의 방에 면벽하면

누가 곁에 있어도 혼자다

 

어깨를 감싸 줄 낯익은 얼굴 같아 돌아봐도

비릿한 냄새가 밴 자리에

눈을 감고 줄지어 앉은 퇴화한 눈들이

연어 비늘처럼 일어난다

 

동굴을 따라 도는 힘으로

철커덕 경전의 한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사람들은 정확히

진도에 따라 열고 닫히는 문을 통과한다

 

무수히 쏟아내는 저 행적을

출렁이는 물결에 지우고 마는 동굴 속 물고기

 

어둠 속에서 어둠까지 지우며

아무것도 기록에 남기지 않는다

 

---

* 제주 용천동굴 호수에 있는 희귀한 이류. 피부는 멜라닌 색소가 적어 옅은 분홍색으로 투명하다.

 

 


 

고지의 정류소

 

 

산엔 눈이 내리고

여긴 꽃이 핀다

 

오르지 않고서는 고지에 닿지 못한다

먼 눈빛으로는 알 수 없는 곳

산 위에서 사람들은 겨울을 걸어 내려왔다

 

중턱에서 오래 머무는 구름은

늘 겨울을 본다

나는 산 아래서 꽃을 보고

겨울을 보기 위해 멀리서

고지를 경유하는 버스를 탄다

 

창밖은 겨울, 순간순간이 지나간다

새들의 날개에 봄을 실어보지만

바람이 움켜쥐고 있는 나뭇가지에

빈 새집만 덩그렇다

 

과거는 현재 속에 있다

지나간 것 같지만 그대로 있다

 

무릎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내려왔을 때

아이젠 한쪽이 달아났고

까마귀 울어대던 고지의 정류소에

까맣게 하늘을 뒤덮고 눈이 쏟아졌다

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길이 끊긴 고지에

봄은 한참이나 멀리 있었다

 

그때도 여전히

산 아래에서 보면

눈구름 위 하늘은 푸르렀고

여기 동백꽃은 붉었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서정시학,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