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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8)

by 김창집1 2024. 10. 10.

 

 

나의 설산

 

 

하얗게 눈 내리면

쩌렁쩌렁한 말씀

 

내처 흘린 쌀 한 톨도 조냥 하라 하시며

할머닌 놋쇠통대를 가마니에 푹 찔렀다

 

밤새 내린 눈처럼 일용함에 소복 담기

저울추 눈금대로 담겨진 포대 자루

한차례 들썩인 마당 파장 끝의 기대도

 

둘러앉은 밥상머리엔 별반 없이 보리밥

공덕동산 오르내려 치성으로 받들던

 

쌀집은 먼 산의 풍요

설산으로 오셨다

 

 


 

진지동굴

 

 

산동백 처연히

붉은 울음 물고 오는데

 

연둣빛 햇살은

아기 웃음만 같아라

 

동굴 밖 매번 오는 봄

저 울음이 보시다

 

그마저 오를 수도

납작 엎드리지도 못한

 

총구 앞 서늘한 경계

멈칫 물러서 돋는 소름

 

바닥을 뒹구는 꽃들,

어느 굴로 숨어드나

 

 


 

윤사월

 

 

한파의 긴 겨울도 베란다에서 견딘 난 화분

이른 봄 폭설에 홀려 까마득히 잊혀져

삽시에 얼려버린 잎,

촛농 맺힌 후회 같아

 

아버지 기일 벌초에 성심이던 형제들도

삭은 관 사이 뵌 모습엔 울컥 눈물이던

두고 간 생의 편린들, 꼭 끌어안으려 했는지

 

무덤 곁 등심붓꽃 만발하던 윤사월 이장

볕 좋은 날 택일엔 부디 편안하시라

선친 땅 가시나물 품

떼를 입혀 올리는 절

 

 


 

공원 벤치

 

 

얼마나 많은 시어가

스쳐 지나쳤을까

 

어제 앉은 그 자리

오늘 다시 읽는다

 

날마다

내가 낯설다

 

훌훌 흩어져간 이름들

 

 


 

이끼

 

 

영월 가는 기차는 터널에 자주 갇혀

 

훤히 비친 그림자 뉘신지 멀어진다

 

산골 역 그냥 지나쳐 확 끼치던 물비린내

 

몇 번의 정차와 몇 번의 흔들림에

 

어느 새 바로 앞에 마주하던 청령포

 

한 발짝 물러서는데 기어이 잡아끌던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가히,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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