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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가을 들꽃의 노래(5)

by 김창집1 2024. 10. 9.

 

 

금꿩의다리 - 소양 김길자

 

 

산새들이 즐겨 노래하는

수목원에서

야리야리한 자줏빛 다리 가진

그녀를 만났다

 

누가 키웠을까

헌칠한 키에

다섯 폭 치마 힘껏 펼쳐 들고

꽃망울 터트리는 그 자태

 

고요가 흐르는 숲속에

보랏빛 꽃잎에 노랑꽃술로

아니,

노랑꽃술이 꽃술 아닌 꽃으로

자신을 지키며 피는 것을

바람은 알았을까

 

 


 

금강초롱 - 홍해리

 

1

 

초롱꽃은 해마다 곱게 피어서

 

금강경을 푸르게 설법하는데

 

쇠북은 언제 울어 네게 닿을까

 

내 귀는 언제 열려 너를 품을까

 

2

 

너를 향해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해

 

부처도 절도 없는 귀먹은 산속에서

 

초롱꽃 밝혀 걸고 금강경을 파노니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

 

 

 

 

물봉선의 고백 - 이원규

 

 

내 이름은 물봉선입니다

그대가 칠선계곡의 소슬바람으로 다가오면

나는야 버선발, 버선발의 물봉선

 

그대가 백무동의 산안개로 내리면

나는야 속눈썹에 이슬이 맺힌 산처녀가 되고

 

실상사의 새벽예불 소리로 오면

졸다 깨어 합장하는 아직 어린 행자승이 됩니다.

 

하지만 그대가

풍문 속의 포크레인으로 다가오고

소문 속의 레미콘으로 달려오면

나는야 잽싸게 꽃씨를 퍼뜨리며

차라리 동반 자살을 꿈꾸는 독초 아닌 독초

 

날 건드리지 마세요

 

나비들이 날아와 잠시 어우르고 가듯이

휘파람이나 불며 그냥 가세요 

 

행여 그대가

딴 마음을 먹을까봐

댐의 이름으로 올까봐

내가 먼저

손톱 발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맹세를 합니다 첫눈을 기다립니다 

 

내 이름은 물봉선

 

여전히 젖은 맨발의 물봉숭아 꽃입니다

 

 


 

각시투구꽃 - 김완

 

 

거창 우두산 가는 길 고견사 입구에서 너를 만났다

낮은 풀숲에 숨어 지나가는 나를 빼꼼히 쳐다보는

보라색 자태가 매혹적이었다 식물도감에

나오는 전형적인 모습이 한눈에 쏘옥 들어왔다

네 모습을 우선 사진기에 담는데 감개가 무량했다

뿌리인 초오는 누군가의 사약으로도 쓰였다

신분의 귀천에 따라 다른 종류의 사약을 썼다니

인간은 죽음 앞에서도 공평하지 못하구나 유명한

너의 이름을 내과 전공의 시작하던 해 처음 알았다

신경통에 좋다고 너의 뿌리를 달여 먹은 후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을 쉴 수 없어 응급실에 온

환자에서 나타나는 무시무시하고 괴이한 심전도

초오 중독에 의한 부정맥은 잘 알려져 있더구나

심심유곡 홀로 밤을 지새우며 뿌리에 맹독을 키우는

예쁜 척 거짓된 사랑을 비웃으며 절치부심하는 너는

산문 밖 세상에서는 피울 수 없는 풍경 같은 꽃이다

 

 


 
 

구절초꽃 - 박얼서

 

 

샘 고을 산내천에 귀를 씻고

하늘을 우러르는 눈빛들

 

만휘군상의 탐욕 그 어떤 티끌 하나도

너에게서 찾을 수가 없구나

 

외로움을 키워내던 고집들

청솔과 바람과 이슬만을 벗 삼더니

시월의 향기를 잉태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