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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의 시(11)

by 김창집1 2024. 10. 11.

 

 

구상나무

 

 

아득한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누구인가

 

한라산 잡목 숲에 울음조차 눌러 삼킨

 

허옇게 신념을 태우며 살아 백 년, 죽어 백 년

 

 


 

봉근물

 

 

평화롭던 섬 안에 돌풍이 시작됐다

시시때때로 낮에는 군인, 밤에는 토벌대

숨죽인 발자국들이

하나둘 늘어만 가고

 

어느 한쪽으로도 기대지 못한 채

부르튼 맨발로 파랗게 엎드린 시간

한수기 곶자왈 궤 안,

일렁이던 거친 숨결

 

투쟁 아닌 투쟁이 끝도 없이 이어진 길

누가 동지고 누가 적인지 섣불리 알 수 없고

그 끝은 장담할 수 없다,

해방구는 어디일까

 

누구의 온정이었나 타는 목 축이라고

숲속 바위틈에 솟아난 봉근물

그것은 총과 칼보다

더 급한 목숨줄이었다

 

 


 

터진목*

 

 

세상 뜬 어느 사내

회오리바람 몰고 온

 

닿을 듯 닿지 못한 젖은 손 내밀며

터진목 붉은 발자국 모래알을 날린다

 

절벽 같은 시간을

파도 위에 뿌려놓고

 

겨우내 모래톱에 새겨 넣은 불립문자

오늘은 누구의 죄를 단죄하려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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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진목 : 성산 앞바다 광치기해변의 학살 터로, 43사건 당시 이곳에서 무고한 양민 400여 명이 무참히 학살되었다.

 

 


 

빛의 벙커

    -반 고흐 전

 

 

툭툭 찍은 점들이

어둠 속에 길을 낸다

 

붓 자국 가는 곳마다 길이 되고 숲을 이뤄

밀밭에 까마귀 떼들 하늘을 날아오르는

 

날마다 꿈을 꾸며

저 들판을 달렸었지

 

지는 해 온기를 담아 끊임없이 덧칠해도

허기진 삶의 모퉁이 소용돌이로 떠밀리는

 

검푸른 하늘에는

그래도 태양은 떴다

 

밤마다 별똥별이 속절없이 떨어져도

방 안의 해바라기꽃 피다 지고, 피다 지는

 

 


 

물과 물이 손 맞잡고

 

 

물과 물이 손 맞잡고 유유히 흐르듯

저 강만 넘으면, 저 강만 넘으면

강화도 민통선 지나 제적봉 평화전망대

 

반세기 훌쩍 넘긴 녹슨 철조망 너머

저항과 시련의 간절함도 무색한 채

새들만 통행증 없이 그곳을 넘나든다

 

흐르는 물줄기를 거역할 수 없듯이

언젠가 통일의 노래 가슴 속속 새기며

망원경 눈 맞춰보는 황해도 능선 바라기

 

 

                        *장영춘 시집 달그락, (한그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