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상나무
아득한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누구인가
한라산 잡목 숲에 울음조차 눌러 삼킨
허옇게 신념을 태우며 살아 백 년, 죽어 백 년
♧ 봉근물
평화롭던 섬 안에 돌풍이 시작됐다
시시때때로 낮에는 군인, 밤에는 토벌대
숨죽인 발자국들이
하나둘 늘어만 가고
어느 한쪽으로도 기대지 못한 채
부르튼 맨발로 파랗게 엎드린 시간
한수기 곶자왈 궤 안,
일렁이던 거친 숨결
투쟁 아닌 투쟁이 끝도 없이 이어진 길
누가 동지고 누가 적인지 섣불리 알 수 없고
그 끝은 장담할 수 없다,
해방구는 어디일까
누구의 온정이었나 타는 목 축이라고
숲속 바위틈에 솟아난 봉근물
그것은 총과 칼보다
더 급한 목숨줄이었다
♧ 터진목*
세상 뜬 어느 사내
회오리바람 몰고 온
닿을 듯 닿지 못한 젖은 손 내밀며
터진목 붉은 발자국 모래알을 날린다
절벽 같은 시간을
파도 위에 뿌려놓고
겨우내 모래톱에 새겨 넣은 불립문자
오늘은 누구의 죄를 단죄하려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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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진목 : 성산 앞바다 광치기해변의 학살 터로, 4․3사건 당시 이곳에서 무고한 양민 400여 명이 무참히 학살되었다.
♧ 빛의 벙커
-반 고흐 전
툭툭 찍은 점들이
어둠 속에 길을 낸다
붓 자국 가는 곳마다 길이 되고 숲을 이뤄
밀밭에 까마귀 떼들 하늘을 날아오르는
날마다 꿈을 꾸며
저 들판을 달렸었지
지는 해 온기를 담아 끊임없이 덧칠해도
허기진 삶의 모퉁이 소용돌이로 떠밀리는
검푸른 하늘에는
그래도 태양은 떴다
밤마다 별똥별이 속절없이 떨어져도
방 안의 해바라기꽃 피다 지고, 피다 지는
♧ 물과 물이 손 맞잡고
물과 물이 손 맞잡고 유유히 흐르듯
저 강만 넘으면, 저 강만 넘으면
강화도 민통선 지나 제적봉 평화전망대
반세기 훌쩍 넘긴 녹슨 철조망 너머
저항과 시련의 간절함도 무색한 채
새들만 통행증 없이 그곳을 넘나든다
흐르는 물줄기를 거역할 수 없듯이
언젠가 통일의 노래 가슴 속속 새기며
망원경 눈 맞춰보는 황해도 능선 바라기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 (한그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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