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설산
하얗게 눈 내리면
쩌렁쩌렁한 말씀
내처 흘린 쌀 한 톨도 조냥 하라 하시며
할머닌 놋쇠통대를 가마니에 푹 찔렀다
밤새 내린 눈처럼 일용함에 소복 담기
저울추 눈금대로 담겨진 포대 자루
한차례 들썩인 마당 파장 끝의 기대도
둘러앉은 밥상머리엔 별반 없이 보리밥
공덕동산 오르내려 치성으로 받들던
쌀집은 먼 산의 풍요
설산으로 오셨다
♧ 진지동굴
산동백 처연히
붉은 울음 물고 오는데
연둣빛 햇살은
아기 웃음만 같아라
동굴 밖 매번 오는 봄
저 울음이 보시다
그마저 오를 수도
납작 엎드리지도 못한
총구 앞 서늘한 경계
멈칫 물러서 돋는 소름
바닥을 뒹구는 꽃들,
어느 굴로 숨어드나
♧ 윤사월
한파의 긴 겨울도 베란다에서 견딘 난 화분
이른 봄 폭설에 홀려 까마득히 잊혀져
삽시에 얼려버린 잎,
촛농 맺힌 후회 같아
아버지 기일 벌초에 성심이던 형제들도
삭은 관 사이 뵌 모습엔 울컥 눈물이던
두고 간 생의 편린들, 꼭 끌어안으려 했는지
무덤 곁 등심붓꽃 만발하던 윤사월 이장
볕 좋은 날 택일엔 부디 편안하시라
선친 땅 가시나물 품
떼를 입혀 올리는 절
♧ 공원 벤치
얼마나 많은 시어가
스쳐 지나쳤을까
어제 앉은 그 자리
오늘 다시 읽는다
날마다
내가 낯설다
훌훌 흩어져간 이름들
♧ 이끼
영월 가는 기차는 터널에 자주 갇혀
훤히 비친 그림자 뉘신지 멀어진다
산골 역 그냥 지나쳐 확 끼치던 물비린내
몇 번의 정차와 몇 번의 흔들림에
어느 새 바로 앞에 마주하던 청령포
한 발짝 물러서는데 기어이 잡아끌던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 (가히,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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