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벌꿀색 햇살이 스며드는
수년 전 가을 어느 날
오일장 좌판 옆에 앉은 두 촌로의 대화
가족의 삶은, 세 번째 시집 『한 컷 제주 100』 (33)에
농사일 얘기를
이번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제호로 쓴다.
기어코
덤으로 주는 호박 한 덩이
그저 나도 호박 한 덩이가 되고 싶다.
2024년 9월
안상근
♧ 하늘 반 나 반
기어코
호박 한 덩이를 덤으로 준다
한 해 동안 수고로움 애써 나누는 게
하늘 덕분이라 외치며
두 손 모은 촌로
농사란 게 나만 한 게 아니란다
하늘 반 나 반
♧ 상춘(賞春)
하늘빛 산빛 사이 물빛에 비친 것은
겨울 민낯 거두오고
드리워진 사월 화관(花冠)
낯선 풍경 담은 거울 하나에
낯익은 봄
역상으로 꽂혀 있다
♧ 봄, 그 바람의 축제
봄을 알리는 게, 어디 꽃뿐이랴
음력 이월 초하루
제주 사람 살리려
찢겨진 몸
바람 아비님 찾아 파도 어미님에 실려 온
생명의 숨결
댕댕댕댕, 댕댕댕댕
연물 장단 치듯
이 땅 사람들 기원 한데 모아
흩어진 몸 하나 되게 하나니
내방신(來訪神) 영등할망
제주의 봄으로 태어난다
둥 댕대댕대, 둥 댕대댕대
연물 장단 퍼지듯
제주 바다는 그녀를 부활시키고
열닷새
바당과 너븐드르에 씨를 뿌리는
그 바람의 축제
댕댕댕댕, 댕댕댕덍
커지는 연물 소리
얼어붙은 겨울 보내고
이 땅에 새 씨앗 뿌리시니
그대 다시 피어난 생명, 부활
봄을 들이시고 나간다
고맙수다, 영등할망
잘 갑서, 영등님
♧ 어느 봄날 늦은 오후
시간이 쉬어가는 동네는 오후가 좋다
백열등의 은은함이 얹히는 것이다
빛과 그림자가 옆으로 눕는
늦은 오후면 더 좋다
집들이 모여 사는 골목에 들어서면
담장들은 여백을 위해 남겨져 있고
그를 통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다
선과 면의 실체에서 벗어나
가까이 서면
오래된 한 덩어리의 느낌이 와서 더 좋다
비로소 그 존재를 확인시키는
그 무수한 빛들이
담벼락과의 대화
외롭지 않은 골목 사람들의
종종 걸음, 더듬대는 수군거림이 화사한
어느 봄날 늦은 오후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 (월간문학출판부,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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