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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시(1)

by 김창집1 2024. 10. 19.

 

 

시인의 말

 

 

벌꿀색 햇살이 스며드는

수년 전 가을 어느 날

오일장 좌판 옆에 앉은 두 촌로의 대화

가족의 삶은, 세 번째 시집 한 컷 제주 100(33)

 

농사일 얘기를

이번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제호로 쓴다.

 

기어코

덤으로 주는 호박 한 덩이

그저 나도 호박 한 덩이가 되고 싶다.

 

 

20249

안상근

 

 


 

하늘 반 나 반

 

 

기어코

호박 한 덩이를 덤으로 준다

한 해 동안 수고로움 애써 나누는 게

하늘 덕분이라 외치며

두 손 모은 촌로

농사란 게 나만 한 게 아니란다

 

하늘 반 나 반

 

 


 

상춘(賞春)

 

 

하늘빛 산빛 사이 물빛에 비친 것은

겨울 민낯 거두오고

드리워진 사월 화관(花冠)

 

낯선 풍경 담은 거울 하나에

낯익은 봄

역상으로 꽂혀 있다

 

 


 

, 그 바람의 축제

 

 

봄을 알리는 게, 어디 꽃뿐이랴

 

음력 이월 초하루

제주 사람 살리려

찢겨진 몸

바람 아비님 찾아 파도 어미님에 실려 온

생명의 숨결

 

댕댕댕댕, 댕댕댕댕

 

연물 장단 치듯

이 땅 사람들 기원 한데 모아

흩어진 몸 하나 되게 하나니

내방신(來訪神) 영등할망

제주의 봄으로 태어난다

 

둥 댕대댕대, 둥 댕대댕대

 

연물 장단 퍼지듯

제주 바다는 그녀를 부활시키고

열닷새

바당과 너븐드르에 씨를 뿌리는

그 바람의 축제

 

댕댕댕댕, 댕댕댕덍

 

커지는 연물 소리

얼어붙은 겨울 보내고

이 땅에 새 씨앗 뿌리시니

그대 다시 피어난 생명, 부활

봄을 들이시고 나간다

 

고맙수다, 영등할망

잘 갑서, 영등님

 

 


 

어느 봄날 늦은 오후

 

 

시간이 쉬어가는 동네는 오후가 좋다

백열등의 은은함이 얹히는 것이다

 

빛과 그림자가 옆으로 눕는

늦은 오후면 더 좋다

 

집들이 모여 사는 골목에 들어서면

담장들은 여백을 위해 남겨져 있고

그를 통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다

 

선과 면의 실체에서 벗어나

가까이 서면

오래된 한 덩어리의 느낌이 와서 더 좋다

 

비로소 그 존재를 확인시키는

그 무수한 빛들이

담벼락과의 대화

 

외롭지 않은 골목 사람들의

종종 걸음, 더듬대는 수군거림이 화사한

어느 봄날 늦은 오후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월간문학출판부,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