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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0월호의 시(2)

by 김창집1 2024. 10. 20.

 

 

치자 꽃 도경회

 

 

다 잊은 줄 알았던

당신 살 내음

눈을 감아야 만져지는 향훈은

희고 매끄러운 살결에 부드러웠다

 

조용하고 포근한 설레임

아름 가득 안기는

저 큰 달

흰옷에서 강 냄새가 난다

 

다시금 바람은 고요히 불고

시간의 흐름조차 잊을 만큼 향을 피우고 있다

끝임*이 고운 미소가 아련하다

그리움 같은

 

---

*첫사랑, 또는 그리워하는 사람을 뜻하는 경남 방언.

 

 


 

눈물방울에 핀 꽃 방순미

 

 

꽃잎 다투어 피고 지는 봄

세상에 꽃 아닌 게 어디 있을까

 

삶도 그러리라

 

젖은 흙 한 삽 덮고

산에서 내려와

 

집 뜰 수척하게 핀 수선화

마주 앉았을 뿐인데 눈물이 앞선다

 

눈물방울에 비친 아흔아흡 송이 꽃

당신께 바칩니다

 

 


 

제비들 왜 멀어졌는가 서병학

 

 

봄날 강남에서 이사 온 제비들 셋방을 구한다

들고양이 황조롱이 뱀 등 천적들로부터 새끼들을 지키고 키우려면

시골집 처마 밑이 안전한데

집주인들 수천 년 내려온 관습법이 바뀌었다며

이제부터 무허가라며 지으면 철거하고 지으면 철거한다

새 법의 이름은 청결법인데 새 법에 따라 제비들은 정화조를 설치하든지

매일 새벽 집 주인이 일어나기 전까지 뜰 청소를 해야 한다

관습법과 청결법이 충돌하자 사람들 신법이 우선이라며

거리낌 없이 제비집을 철거하였고

사람들의 행패에 심신이 지친 제비들 종교에 귀의하여

흥부교를 믿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지만

흥부교는 이미 쇠퇴하여 신자가 사라졌고

무한 경쟁 시대 놀부교가 융성하게 되어

이제는 사람 사는 집 처마 밑에 제비가 집을 지으면

다리를 부러뜨려도 장대로 맞아도 집을 헐어도

배상도 못 받고 무단 침입자인 제비가 죄인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청결법 폐지를 추진할 수 없는 제비들

이제는 사람들 곁에서 떨어져 살기로 결의하고

사람 사는 집 처마 밑에는 안 오기로 했다는 풍문이 있다

 

 


 

- 오영현

 

 

혈액검사 후 재검을 받으라는 문자가 왔다

술도가를 차린 식습관이 피의 순수를 앗아간 것인지

내 피는 내 사상만큼이나 불순한가 보다

 

돼지나 유채 씨를 사고팔 때

저울질하고 난 뒤에는 꼭

털고 몇 근!’이라는 말이 뒤따랐다

피를 별도로 저울질한 것은 아니었으나

돼지의 순수에만

유채 씨의 순수에만 값을 매기겠다는 것이었다

 

몸무게가 갑자기 줄어 날마다 저울질을 한다

겉옷을 입은 채로 뜨다가는 그게 아닌 듯해

속옷만 입은 채로 뜨기도 하고

그것은 맞나? 하면서 속옷마저 벗고서 뜬다

 

알몸으로 저울 위에 오르면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떠야 할 것 같고

용변을 보고 난 뒤라야 더욱

피를 피답게 턴 것이려니 하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내 안에 흐르는 피를 맑게 하는 일과

내게서 거듭거듭 피를 털어 내는 일은

나의 순수를 찾아가는 일

 

다만, ()까지 터는 일은 없기를!

 

---

* 나의 지인은 몸무게를 저울로 뜬다라는 표현을 못마땅해 한다.

 

 


 

너에 대한 질문 윤대근

 

 

복수초는 왜 눈 속에서 피어나는 걸까요?

국화는 왜 추위에 저항하다가 스러질까요?

해바라기는 왜 하루 종일 해바라기만 할까요?

달맞이꽃은 왜 밤에만 피어날까요?

연영초는 왜 숲속에 숨어 살까요?

갯메꽃은 왜 바닷가 모래에서 피어날까요?

수선화는 왜 고개 숙여 제 얼굴에 취했을까요?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모든 생명들이 미소로 말합니다

그냥 살아 꽃피우는 것

바로 행복이 아니냐고 답합니다

읍내 오일장 시장 안 사람들처럼

그렇게 왁자지껄 싱싱하게

 

 


 

누수 이규홍

 

 

누수는 낡고 오래된 건물

노후된 배관에서만

발생하는 줄 알았는데

누수의 원인은 다양하여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다

집안에 물이 샌다면

옥상이 원인이겠지

지붕을 뜯고 나면

외벽이 문제라네

코킹이 원인이라네

다시 옥상으로 올라가

천장을 들쑤시고 나면

건물은 초주검이 된다

어금니 꾹 깨물고

입단속을 하고 살지만

어느 틈으로 새 나갔는가

고삐 풀린 말처럼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수습할 수 없는 나의 말

피가 마르다 녹초가 된다

 

 

                    *월간 우리10월호 (통권 제43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