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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0월호의 시(3)

by 김창집1 2024. 10. 23.

 

 

조지아 아가씨 이산

 

 

그녀의 말은

천둥처럼 묵직했고 눈빛은

번개처럼 단호했다.

 

나는 러시아어를 몰라요. 영어로 말하세요!”

 

패전의 대가로

조국 남오세티야 영토 안의 적군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견고한 증오가 묻어났다

 

빼곡히 둘러싼 선반 위 wine 또한

붉은 피를 토하고

하안 거품을 물며 격렬히 외쳤다

 

한 병의 wine을 팔지 못할지언정

결코

내놓을 수 없는 조국이다

 

사관생도처럼 신성한

그녀의 가슴에는

 

코카서스는 있지만, 캅카스는 없고

조지아에는 그루지야가 없다

 

 


 

충전 - 이영란

 

 

  40일째 잠을 자지 못한 a는 잠자는 것을 잊어버렸다 a의 뇌에서는 회의가 시작되었다 앞으로도 잠자는 것을 기억하지 맙시다 머릿속에 쌓여 있는 것도 모두 삭제하는 게 좋습니다 b2년 전에 죽었다 근데 자꾸 말을 건다 사람들은 b가 죽었다고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가끔 b에게서 카톡이 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말을 생각하기로 했다 c는 나만 아는 사람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몇 번이나 고쳤다 그는 지금도 이 사실을 모른다 c는 여름인데도 겨울 모자를 쓰고 있다 나는 c를 잡아당겨 숨김 버튼을 누른다 새벽이 오고 있는 줄 몰랐다

 

 


 

빗소리 - 이제우

   -누에 밥 먹는 소리

 

 

사록사록

사르륵사르륵〜〜

밤새도록 들리는 소리

 

보슬비 소리인가

가랑비 소리인가 했더니

 

우리 누에 밥 먹는 소리

예쁘고 정다운 소리

 

샤륵샤륵

사르륵사르륵〜〜

 

강산이 일곱 번이나 변했건만

귓속에 맴도는 그 아련한 빗소리

 

 


 

그리움 난파되다 임미리

 

 

물비늘에 취해 바다를 누비고 싶었다

오래심에 친구에게 털어놓은 꿈

장롱 속에서 녹슬어 가고 있는 것처럼

몰래 훔쳐본 타인의 관심에 무심한 이력이 붙었다

세월이 갈수록 빈곤으로 더 작아지는 몸

허리가 휘어지도록 바다에 젊음을 바친 대가다

봄날의 항구에서 헛디딘 발

바닥보다 더 아래로 굴러 낙하했다

한 끼의 버거움에 누가 알까 쉬쉬하며

입원과 수술에 찌들어 퇴원했으나

기력을 다한 몸과 허름해진 마음 갉아먹히는지

눈에 띄게 초췌해져 간다

젊은 날의 흥에 세포가 꿈틀거리고 일어서면

젓가락 그 작은 틈 사이에서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

치맛자락에 붉은 작약이 피어난다

봄날은 꽃잎처럼 이울어

사람들 앞 치부를 드러내는 줄도 모른 채 애절하다

이제 세월에 잡아먹히는 것이라고

깊어진 우울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기억이 점점 풍화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바닷바람 불어오면 옛 기억 수줍게 일어서는지

낯선 이들뿐인 거리에서 바람을 붙든다

새들도 떠나가 버린 텅 빈 마을

홀로 올 수 없는 이들을 기다리느라 처량하다

바다를 배회한 지 오래된 습관

장승처럼 세월을 품은 그리움 풍랑에 난파된다

 

---

*봄날은 간다노래 가사

 

 


 

이방인 시편 - 장성호

   -어떤 능소화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온통 비 냄새가 난다

이방인 최모(50)씨가 얼굴이 창백한 한 여인에게 다가간다

그는 숨을 크게 내쉬고

우울한 표정으로 무겁게 입을 연다

그대여

난 어젯밤 악몽을 꾸었소

어떤 남자의 육체가 그대를 꼭 감싸며

그대의 붉은 심장을 끌어당기고 있었소

난 딴 곳으로 걸어가서 슬픈 얼굴이 되었소

그는 꿈이 생시인 것처럼 말을 잇는다

그대는 그가 단지 친구였다고 나에게 말했소

난 그대가 그와 뜨겁게 여러 번 포옹하는 걸 보았소

그가 그대를 어찌 그토록 부드럽게 안을 수 있었소

내 가슴이 산산조각 난 유리잔이었소

그대여,

난 여전히 그대를 사랑하오

난 그대가 떠나지 않기를 원하오

오솔길에서 시든 능소화 한 송이

비바람에 뚝 떨어진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푸른 빗물이 된다

 

 


 

자벌레 차영호

 

 

봄 꽁무니에 묻어와

도심 베란다에 갇힌

외뿔

 

손대면

빳빳해지는 고동연두

 

우주로 가는

조이스틱

 

월 그리 빤히

올려다보시나?

 

나는 자네를 조종하여

이미 지구를 탈출했는 걸

 

 

             *월간 우리10월호(통권 제43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