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지아 아가씨 – 이산
그녀의 말은
천둥처럼 묵직했고 눈빛은
번개처럼 단호했다.
“나는 러시아어를 몰라요. 영어로 말하세요!”
패전의 대가로
조국 남오세티야 영토 안의 적군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견고한 증오가 묻어났다
빼곡히 둘러싼 선반 위 wine 또한
붉은 피를 토하고
하안 거품을 물며 격렬히 외쳤다
한 병의 wine을 팔지 못할지언정
결코
내놓을 수 없는 조국이다
사관생도처럼 신성한
그녀의 가슴에는
코카서스는 있지만, 캅카스는 없고
조지아에는 그루지야가 없다
♧ 충전 - 이영란
40일째 잠을 자지 못한 a는 잠자는 것을 잊어버렸다 a의 뇌에서는 회의가 시작되었다 앞으로도 잠자는 것을 기억하지 맙시다 머릿속에 쌓여 있는 것도 모두 삭제하는 게 좋습니다 b는 2년 전에 죽었다 근데 자꾸 말을 건다 사람들은 b가 죽었다고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가끔 b에게서 카톡이 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말을 생각하기로 했다 c는 나만 아는 사람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몇 번이나 고쳤다 그는 지금도 이 사실을 모른다 c는 여름인데도 겨울 모자를 쓰고 있다 나는 c를 잡아당겨 숨김 버튼을 누른다 새벽이 오고 있는 줄 몰랐다
♧ 빗소리 - 이제우
-누에 밥 먹는 소리
사록사록
사르륵사르륵〜〜
밤새도록 들리는 소리
보슬비 소리인가
가랑비 소리인가 했더니
우리 누에 밥 먹는 소리
예쁘고 정다운 소리
샤륵샤륵
사르륵사르륵〜〜
강산이 일곱 번이나 변했건만
귓속에 맴도는 그 아련한 빗소리
♧ 그리움 난파되다 – 임미리
물비늘에 취해 바다를 누비고 싶었다
오래심에 친구에게 털어놓은 꿈
장롱 속에서 녹슬어 가고 있는 것처럼
몰래 훔쳐본 타인의 관심에 무심한 이력이 붙었다
세월이 갈수록 빈곤으로 더 작아지는 몸
허리가 휘어지도록 바다에 젊음을 바친 대가다
봄날의 항구에서 헛디딘 발
바닥보다 더 아래로 굴러 낙하했다
한 끼의 버거움에 누가 알까 쉬쉬하며
입원과 수술에 찌들어 퇴원했으나
기력을 다한 몸과 허름해진 마음 갉아먹히는지
눈에 띄게 초췌해져 간다
젊은 날의 흥에 세포가 꿈틀거리고 일어서면
젓가락 그 작은 틈 사이에서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려
치맛자락에 붉은 작약이 피어난다
봄날은 꽃잎처럼 이울어
사람들 앞 치부를 드러내는 줄도 모른 채 애절하다
이제 세월에 잡아먹히는 것이라고
깊어진 우울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기억이 점점 풍화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바닷바람 불어오면 옛 기억 수줍게 일어서는지
낯선 이들뿐인 거리에서 바람을 붙든다
새들도 떠나가 버린 텅 빈 마을
홀로 올 수 없는 이들을 기다리느라 처량하다
바다를 배회한 지 오래된 습관
장승처럼 세월을 품은 그리움 풍랑에 난파된다
---
*〈봄날은 간다〉노래 가사
♧ 이방인 시편 - 장성호
-어떤 능소화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온통 비 냄새가 난다
이방인 최모(50대)씨가 얼굴이 창백한 한 여인에게 다가간다
그는 숨을 크게 내쉬고
우울한 표정으로 무겁게 입을 연다
그대여
난 어젯밤 악몽을 꾸었소
어떤 남자의 육체가 그대를 꼭 감싸며
그대의 붉은 심장을 끌어당기고 있었소
난 딴 곳으로 걸어가서 슬픈 얼굴이 되었소
그는 꿈이 생시인 것처럼 말을 잇는다
그대는 그가 단지 친구였다고 나에게 말했소
난 그대가 그와 뜨겁게 여러 번 포옹하는 걸 보았소
그가 그대를 어찌 그토록 부드럽게 안을 수 있었소
내 가슴이 산산조각 난 유리잔이었소
그대여,
난 여전히 그대를 사랑하오
난 그대가 떠나지 않기를 원하오
오솔길에서 시든 능소화 한 송이
비바람에 뚝 떨어진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푸른 빗물이 된다
♧ 자벌레 – 차영호
봄 꽁무니에 묻어와
도심 베란다에 갇힌
외뿔
손대면
빳빳해지는 고동연두
우주로 가는
조이스틱
월 그리 빤히
올려다보시나?
나는 자네를 조종하여
이미 지구를 탈출했는 걸
*월간 우리詩 10월호(통권 제436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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