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은 흘러가면서 깊은 여백을 남겨두었다*
슬픔의 등이 깨지는 하루
외롭지 않으려고 나는 강으로 간다
생각하지 않으면 슬픔은 눈물이 없을 수 있다
전에는 보지 못한, 어쩐지 강가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해당화가 피었다
꽃이 피고서야 거기 있는 줄 알았다
장미를 생각나게 하는 향기가 슬픔으로 배이다
가만히 꽃잎을 만진다. 입술 같은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은 허기
펄럭이는 것들을 강물에 흘려보내려고
그러나 아무것도 흘려보내지 못하고
강가에 주저앉는다
강을 떠미는 바람은 물비늘을 만들고
나날이 억세지는 갈대나
간간이 웃고 있는 애기똥풀
갑자기 치렁치렁 주머니를 늘어뜨리는 아카시아
무성하기 위해 아우성친다
강에는 가만히 강다운 것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거기에 없는 게 아니다
바다의 걸음과 산의 높이가 함께 드리운다
강은
들리지 않는 소리를 증폭시키고
움직이지 않고 살아있는 것들을
살게 한다
날마다 다른, 소소한
내가 만드는 풍경들을 바라본다
강은 흘러가면서 깊은 여백을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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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업 : 「철새들의 본적」에서.
♧ 멀미
센바람을 타고
박주가리 씨앗처럼 날아왔다
낮은 울타리 안에
무거운 짐을 흥건히 부려놓고
신발 끈을 단단히 새로 묶고
길이 없는 숲으로 갔다
나무를 쓰러뜨린 것이 바람인 줄 알았으나
기계톱에 나무가 넘어가는 쪽으로 바람이 일었다
여린 가지들이 마르는 걸 처음 보았다
우듬지부터 벌겋게 죽어가는 재선충 소나무
떨어지는 숨이 밑동에 붙어 헐떡거렸다
가시덤불이 허벅지까지 기어올랐다
나의 휴식은
흔들리지 않는 물가면 좋겠는데
어느 방향으로 보나 바다가 퍼렇게
나를 흔들었다
파도가 혀를 날름거리며 창을 밀고 들어왔다
반도半島 깊숙한 분지에서는 절대
찰랑거리는 물의 입술을 보지 못했다
섬은
바다 한가운데서 떠돌고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한 나는
심한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 귀
허술한 초소를 지나갈 때
한순간 혼자가 되어 긴장하는 것처럼
잠이 마르는 새벽 한 시
손을 놓고 우두커니 앉는다
풀벌레 소리에 귀가 밝아지는데
어둠이 눈을 감고 문 앞에서 읍揖한다
한 시간 전 일이 어제가 되고,
곱게 잠든 이의 귀밑머리가 희다
풀어버린 두터운 손
산등성이처럼 굽어 내리는 어깨
가는 길은 멈출 수 없는지 푸푸 호흡이 걸린다
내가 잠들지 않고 잠든 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오늘의 가장 빠른 시각에
어제의 고된 얼굴로 서로가 낯설다
오늘 깨어 있는 사람이
침묵으로 벽을 깨는 일
오랫동안
마주 바라보지 못한 굽은 시간을
차곡차곡 펴 바르는 새벽 두 시
지나쳐버린 순간에도
가슴에 머금은 따뜻한 언어가 잘 들리도록
환히 길을 열어 두고 있는 귀
♧ 카페에 앉은 고래
한 사람이 문을 열자
지워지던 붉은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줄이 끊이진 풍금은 어둠을 안고
중간으로 접어 앉았다
단지 희고 검은 이빨을 앙다문 채
방부防腐의 세월을 건너
오래되고 벗겨진 흔적의 살가죽만이 건재한
내가 나였음을
나였던 것들의,
멀리 사라져간 파도들
허파에 가득 바람 담아 심연을 노래했던
레 파 라 푸른 물결의 음계들
떠도는 시간의 이름들
커피 향 가득 풀린 얕은 수조 속에서
수면으로 솟구치고 싶은 고래
♧ 황홀한 약속
내가 어디에 있든
서로 양방향에서 거리를 좁혀
같은 시간을 바라볼 것
귀를 열고 약속을 열두 시쯤으로 적는다
그때부터 맘은 온통 거기에 가 있다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고 거기에 묶여 빗장을 건다
환절기엔 비가 자주 온다
젖은 나무에서 새순이 뾰족 얼굴을 내밀 듯
마음 한쪽을 열고 충분히 젖는다
다가오는 미래가 어떻게 전개 될지
심장까지 빗물이 스며들 때까지도 모른다
모든 귀를 닫아도 들리는 음성,
나와 다른 주파수를 가진 당신은 나를 부르고
내 가슴에 깊은 무늬를 새기고 사라질까 봐
나는 그것을 계속 되뇐다
표정을 보지 않고도 나를 조종한다
여기의 아침과 거기의 아침은 다르겠지만
반경에 구속된 나는 줄에 이끌려 당겨진다
비가 원인은 아니다
타협에 따라 결정되고
약속하는 순간부터 이미 당신을 만난 기분
언제 도착해야 할지 두근거린다
언제까지 우아하게 머무를 수 있을까
꽃봉오리를 두근거리게 하는 빗소리
몸은 습관처럼 기울어도 자꾸 일어선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 (서정시학,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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