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 한 마디 – 정형무
으스름달밤 어머니 댁에서
무슨 일로 아내와 다투고 나서
창유리에 어린 고구마순 그림자를 멀뚱거리다
“그림자에도 색깔이 있어…” 한숨지었더니
부스럭거리던 아내
슬그머니 다리 한쪽을 내 배에 올려놓으며
“당신은 참말 멋진 남자예요” 속삭여 주었네
별안간 잘난 남자가 된 나와 아내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오순도순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네
고구마 줄기처럼 얽혀 살다
다시 태어나도 또 이렇게 살자 하고
손가락 걸고 입 맞추며
무시로 배꼽을 맞추었네
말 한마디 번쩍인 다음
구름과 비를 부른 밤이었네
♧ 족족足足 - 홍해리
매화는 꽃을 피워 벌 나비를 부르지 않고,
난초는 꽃을 피워도 소문을 내지 않는다.
국화는 서리가 내려도 탓하지 않고,
대숲이 소란스럽다 바람 탓하지 않는다.
♧ 평일도 섬사람 – 최병암
완도까지 천 리 길 내달려
고금도 지나 또 배 타고
바다 건너 평일도 드디어 들다.
거기 거친 바다 지키며 40년
구릿빛 얼굴 굵은 주름
오랜 나의 친구 어부의 얼굴
그 함박웃음 나를 기다리네.
노량 앞바다 아스라이 보이고
마지막 결전 치른 삼도수군통제영
400년 전 결사의 함성이
짙푸른 파도 소리와 함께 되살아
그 옛적 전설이 된 어부이면서 전사들
그 영혼과 피 면면히 이어져
결기에 찬 그 얼굴들 그대 얼굴에 서려.
지금도 그때처럼 남해바다 건너온
짜디짠 바람 세차게 얼굴을 때리고
뜨거운 태양 그 무자비한 열기에
온몸이 달구어져 지쳐 쓰러질지언정
바다 밑 깊은 갯벌 다시마 굵은 줄기처럼
민초의 삶, 산 역사의 뿌리 든든히 내리고
우리 바다 지켜 일어선 또 하나의 전설, 평일도 섬사람.
♧ 야간 – 김정식
늦게 일을 마치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집 아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릴 적 노동일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오신 아버지께서
주름진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 하얀 산 – 남택성
이 길을 너도 걸었을 것 같다
길이 길을 물고 끝없이 흘러가 하늘과 닿는 초원
먼 곳까지 단숨에 시야가 트여
붉은 길에 이끌려 걷다 보면
어느 새 날 어두워지고 돌아갈 길은 멀어라
광활한 벌판에 양 떼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꽃 보기 위해 풀밭에 쪼그려 앉는다
에델바이스는 몽골어로 차강 올, 하얀 산이라는 뜻
언젠가 너는 고원을 걷는다며 솜털 묻어나는 이 꽃을 찍어 보냈지
숨을 고르고 둘러보니 낮은 풀 사이사이 산이 온통 하얗게, 꽃이다
낮은 언덕과 사방으로 난 길과 바람 속에서
이 곳 사람들은 어떻게 길을 잃지 않을까
양들은 저녁마다 잘도 집으로 갈까
바람을 지나온 저녁이 가만히 어깨에 손을 얹을 때
일찍 찾아온 별 있어 차강 올이라 이름 붙이고
마음 포갠다
너도 어느 바람 아래
별 돋는 저녁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니
바람 불 때면 어둠이 깃든 눈꺼풀을 열며
무심히 하늘을 바라볼 것이니
♧ 거미 – 도경희
무릎치마 끝 휘청휘청 늘어진 씨줄에
만 가지 사연으로 날줄 엮고
팽팽한 눈썹줄이 휘도록
바디질하여
하늘을 꾸미는 너
허공에 비단필을 짜는구나
바람에 실려 떠가는 솜털 부드러운 새끼들
아련한 핏줄
갸올은 올실 따라 돌아와
밤이 사라질 때까지
꿈을 꾸겠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 월간 『우리詩』 10월호(통권 제436호)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10) (0) | 2024.10.28 |
---|---|
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3) (0) | 2024.10.27 |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8) (2) | 2024.10.25 |
김항신 시집 '연서戀書'의 시(완) (0) | 2024.10.24 |
월간 '우리詩' 10월호의 시(3) (2) | 2024.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