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대로 오다
누구를 보냈는가
무엇을 밝히던가
금채기 해녀들을 다 가둔 당신의 바다
산지천 거슬러 와서 새별꽃을 피우네
사라별도 벼랑 위를 뛰어내린 파도에
늦도록 꿈꾸었던 미완의 탈출마저
풍랑에 풍랑을 더해
끝끝내 묶어놓아
갈퀴손 쟁기로 수평선을 걷어내도
아무도 못 보내며 못 들어서는 섬이여
떠나라,
당장 떠나라
다시 불을 밝히네
♧ 삼릉숲
우뚝 솟아 을라야만 바른길 아니라며
금동신라 무게를 나무는 짊어 졌을까
등 굽혀 받들어 올린 능의 숨결 뜨겁다
비스듬히 한데 기울인, 천년의 바람 소리
푸른빛 감아 도는 숨바꼭질 그 아이
송진내 맡은 봄볕이 술래를 꼭 붙든다
함께 걷던 할머니 순식간 사라졌다
바라밀다 암송하시던 언덕에 이르셨나
손때로 얼룩진 염주 내 마음의 부처들
♧ 누구신가
길을 놓친 봄날은
절벽의
목숨 같아
안개비
휘파람새 소리
지레 겁먹은 아이
산벚꽃
젖은 꽃잎에
어른대는
저 그림자
♧ 표해록漂海錄
화랑포 절벽 위로 몰아치던 칼바람
난파선 바위에 얹혀, 폭풍을 벗어나던
목숨줄, 칠흑의 어둠 속 푸르게 잡아매 준
1770년 제주 포구 한양 뱃길 장한철
섬에서 섬 갇힌 몸이, 돌려놓은 관문에
해양 길 다시 쓰는 일지, 혈육으로 맺은 이
몇 생을 다시 살아 펼쳐질 세상 앞에
사내의 굳은 맹세 끌어안은 순정은
제주 섬 그 한가운데 너를 들어 올리는
철해 놓은 날마다 풍향계 휘어 들어
멈추지 않는 집념에 돛을 올린 그날 같아
표해록 펄떡이는 파도, 휩쓸려 다 젖는 몸
♧ 동백민박
거품 물고 돌아온다
갈기 세운 애월 바다
자진몰이
휘몰이장단
목이 쉰
동굴 속으로
파도에 휩쓸리는 잠
편도염 붉게 피네
♧ 그 꽃의 안부
무엇이 끌어당겨 성벽 터에 이르나
등줄기 땀 식히는 산바람 불어 젖혀
기어코 밀고 들어와 자리 잡은 망초꽃
용장산성 길 위에 끝끝내 버티던 항전
물러설 이유 없었던 내 나라를 받들어
아무도 파헤치지 못할, 뿌리들의 그 노래
뼛속 깊이 저항했던 왕온王溫의 무덤 앞에
언제 도열했는지 삼별초 깃발 날린다
하얗게 일어서는 이 심장으로 들이친다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 (가히,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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