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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10)

by 김창집1 2024. 10. 28.

 

 

등대로 오다

 

 

누구를 보냈는가

무엇을 밝히던가

 

금채기 해녀들을 다 가둔 당신의 바다

산지천 거슬러 와서 새별꽃을 피우네

 

사라별도 벼랑 위를 뛰어내린 파도에

늦도록 꿈꾸었던 미완의 탈출마저

 

풍랑에 풍랑을 더해

끝끝내 묶어놓아

 

갈퀴손 쟁기로 수평선을 걷어내도

아무도 못 보내며 못 들어서는 섬이여

 

떠나라,

당장 떠나라

다시 불을 밝히네

 

 


 

삼릉숲

 

 

우뚝 솟아 을라야만 바른길 아니라며

금동신라 무게를 나무는 짊어 졌을까

등 굽혀 받들어 올린 능의 숨결 뜨겁다

 

비스듬히 한데 기울인, 천년의 바람 소리

푸른빛 감아 도는 숨바꼭질 그 아이

송진내 맡은 봄볕이 술래를 꼭 붙든다

 

함께 걷던 할머니 순식간 사라졌다

바라밀다 암송하시던 언덕에 이르셨나

손때로 얼룩진 염주 내 마음의 부처들

 

 

 

 

누구신가

 

 

길을 놓친 봄날은

 

절벽의

목숨 같아

 

안개비

휘파람새 소리

 

지레 겁먹은 아이

 

산벚꽃

젖은 꽃잎에

 

어른대는

저 그림자

 

 


 

표해록漂海錄

 

 

화랑포 절벽 위로 몰아치던 칼바람

 

난파선 바위에 얹혀, 폭풍을 벗어나던

 

목숨줄, 칠흑의 어둠 속 푸르게 잡아매 준

 

1770년 제주 포구 한양 뱃길 장한철

 

섬에서 섬 갇힌 몸이, 돌려놓은 관문에

 

해양 길 다시 쓰는 일지, 혈육으로 맺은 이

 

몇 생을 다시 살아 펼쳐질 세상 앞에

 

사내의 굳은 맹세 끌어안은 순정은

 

제주 섬 그 한가운데 너를 들어 올리는

 

철해 놓은 날마다 풍향계 휘어 들어

 

멈추지 않는 집념에 돛을 올린 그날 같아

 

표해록 펄떡이는 파도, 휩쓸려 다 젖는 몸

 

 


 

동백민박

 

 

거품 물고 돌아온다

 

갈기 세운 애월 바다

 

자진몰이

휘몰이장단

 

목이 쉰

동굴 속으로

 

파도에 휩쓸리는 잠

 

편도염 붉게 피네

 

 


 

그 꽃의 안부

 

 

무엇이 끌어당겨 성벽 터에 이르나

 

등줄기 땀 식히는 산바람 불어 젖혀

 

기어코 밀고 들어와 자리 잡은 망초꽃

 

용장산성 길 위에 끝끝내 버티던 항전

 

물러설 이유 없었던 내 나라를 받들어

 

아무도 파헤치지 못할, 뿌리들의 그 노래

 

뼛속 깊이 저항했던 왕온王溫의 무덤 앞에

 

언제 도열했는지 삼별초 깃발 날린다

 

하얗게 일어서는 이 심장으로 들이친다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가히,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