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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0월호의 시(4)

by 김창집1 2024. 10. 26.

 

 

말 한 마디 정형무

 

 

으스름달밤 어머니 댁에서

무슨 일로 아내와 다투고 나서

창유리에 어린 고구마순 그림자를 멀뚱거리다

그림자에도 색깔이 있어한숨지었더니

 

부스럭거리던 아내

슬그머니 다리 한쪽을 내 배에 올려놓으며

당신은 참말 멋진 남자예요속삭여 주었네

 

별안간 잘난 남자가 된 나와 아내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오순도순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네

 

고구마 줄기처럼 얽혀 살다

다시 태어나도 또 이렇게 살자 하고

손가락 걸고 입 맞추며

무시로 배꼽을 맞추었네

 

말 한마디 번쩍인 다음

구름과 비를 부른 밤이었네

 

 


 

족족足足 - 홍해리

 

 

매화는 꽃을 피워 벌 나비를 부르지 않고,

 

난초는 꽃을 피워도 소문을 내지 않는다.

 

국화는 서리가 내려도 탓하지 않고,

 

대숲이 소란스럽다 바람 탓하지 않는다.

 

 


 

평일도 섬사람 최병암

 

 

완도까지 천 리 길 내달려

고금도 지나 또 배 타고

바다 건너 평일도 드디어 들다.

거기 거친 바다 지키며 40

구릿빛 얼굴 굵은 주름

오랜 나의 친구 어부의 얼굴

그 함박웃음 나를 기다리네.

 

노량 앞바다 아스라이 보이고

마지막 결전 치른 삼도수군통제영

400년 전 결사의 함성이

짙푸른 파도 소리와 함께 되살아

그 옛적 전설이 된 어부이면서 전사들

그 영혼과 피 면면히 이어져

결기에 찬 그 얼굴들 그대 얼굴에 서려.

 

지금도 그때처럼 남해바다 건너온

짜디짠 바람 세차게 얼굴을 때리고

뜨거운 태양 그 무자비한 열기에

온몸이 달구어져 지쳐 쓰러질지언정

바다 밑 깊은 갯벌 다시마 굵은 줄기처럼

민초의 삶, 산 역사의 뿌리 든든히 내리고

우리 바다 지켜 일어선 또 하나의 전설, 평일도 섬사람.

 

 

 

 

야간 김정식

 

 

늦게 일을 마치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집 아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릴 적 노동일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오신 아버지께서

주름진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하얀 산 남택성

 

 

이 길을 너도 걸었을 것 같다

길이 길을 물고 끝없이 흘러가 하늘과 닿는 초원

 

먼 곳까지 단숨에 시야가 트여

붉은 길에 이끌려 걷다 보면

어느 새 날 어두워지고 돌아갈 길은 멀어라

 

광활한 벌판에 양 떼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꽃 보기 위해 풀밭에 쪼그려 앉는다

 

에델바이스는 몽골어로 차강 올, 하얀 산이라는 뜻

언젠가 너는 고원을 걷는다며 솜털 묻어나는 이 꽃을 찍어 보냈지

 

숨을 고르고 둘러보니 낮은 풀 사이사이 산이 온통 하얗게, 꽃이다

낮은 언덕과 사방으로 난 길과 바람 속에서

이 곳 사람들은 어떻게 길을 잃지 않을까

양들은 저녁마다 잘도 집으로 갈까

 

바람을 지나온 저녁이 가만히 어깨에 손을 얹을 때

일찍 찾아온 별 있어 차강 올이라 이름 붙이고

마음 포갠다

 

너도 어느 바람 아래

별 돋는 저녁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니

바람 불 때면 어둠이 깃든 눈꺼풀을 열며

무심히 하늘을 바라볼 것이니

 

 


 

거미 도경희

 

 

무릎치마 끝 휘청휘청 늘어진 씨줄에

만 가지 사연으로 날줄 엮고

팽팽한 눈썹줄이 휘도록

바디질하여

하늘을 꾸미는 너

허공에 비단필을 짜는구나

 

바람에 실려 떠가는 솜털 부드러운 새끼들

아련한 핏줄

갸올은 올실 따라 돌아와

밤이 사라질 때까지

꿈을 꾸겠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 월간 우리10월호(통권 제43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