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대 마을 이장 – 김혜천
도시 생활이 각박하다구요?
십 년 동안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지냈다구요?
여름내 옻닭을 끓여 식구들을 먹이기도 전 퍼 나르는
같은 층 이 여사
꽃밭을 잘 가꾸어 행인을 기쁘게 하고 시골서 농작물이
오면 나누기 바쁜 건너 동 소설가
투병 중이면서도 명랑을 잃지 않는
성경책 읽는 것이 일상인 품격의 아이콘 옆집 노 여사
얼마간 기척이 없으면 별일 없으시죠? 하면서
현관을 노크하는 다정다감 위층 박 여사
봄에는 화전놀이로 가을에는 송편 만들기로
가꿈은 찻자리로 마음을 모으는
나는 순하디순한 이 환대 마을의 시 쓰는 이장이랍니다.
♧ 종이의 변증법 - 나병춘
종이는 칼이다
무심코 누군가 보내 준 시집 모서리에 살짝 베이다
핏방울이 슬몃 비추더니
이내 이슬처럼 맺힌다
‘핏방울로 써라’ 하는 듯
백지 모서리가 나를 쏘아본다
쪽을 열 때마다 매서운 눈망울들
꼭꼭 눌러쓴 펜촉의
예리한 끝이 느껴진다
무림 고수의 서늘한 눈빛
섬광처럼 빛난다
일진광풍이 휘몰아친다
합, 합, 합
순식간에 결판나는 칼싸움
댓잎 사이 번지는 달빛 그림자
칼을 놓친 자는 말없이 표표히 사라진다
‘바늘로 우물을 파라’*
여행도 글쓰기도
바늘로 우물 파듯
심장을 콕콕, 저미는구나
아차
한눈팔다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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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한 파묵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에서 인용.
♧ 11월 – 남대희
바람이 창문을 스친다
낡은 나뭇잎들 총총히 잠들고
길 위엔 떨어진 기억들만 조용히 남아 있다
차가운 공기 속에 스며든 향기
누군가의 옛이야기 같은
무성한 침묵의 흔적들
노을이 희미해지는 저녁
하늘은 한층 깊어지고
나무들은 더 이상 말이 없다
서리 내린 아침이 다가올 때쯤
우린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잊혀질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한 번의 떨림을 기다리는…
♧ 당신이 나의 시詩입니다 - 목경희
당신은 내 삶의 빛이자 그림자,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나를 맴돌고
내 마음을 흔드는 시詩입니다
당신은 내 사랑의 시작이자 끝,
사랑과 이별, 그리움을 가르쳐 주고
나의 등을 다독여 줍니다
당신 없는 세상은 나를 절망하게 만들고
이별은 나를 끝없는 슬픔 속에 빠뜨립니다
내 삶의 가장 큰 슬픔이자 아픔
평생 안고 가아 할 상처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나를 위로하고
당신의 존재가 내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당신은 내 삶의 길을 밝혀 주는 등대입니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을 시詩로 채우는
당신이 나의 시詩, 나의 전부입니다.
♧ 파는 이유 – 장우원
- 일 끝나면 녹초가 됩니다
- 코로나로 집에서 쓰려고 샀지만
- 취미보다 생활비가 필요해서
- 급전 때문에
- 꼭 필요한 분께 보내고 싶어요
- 사 놓고 바빠서 개봉만 했어요
인터넷 중고 매물에는
물건보다 더 많은
사람이 들어 있다
눈물이 녹아 있다
*월간 『우리詩』 11월호(통권 제437호)에서
*사진 : '나무의 사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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