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보다 가벼운 주검
떨어지는 게 먼저인지
시드는 게 먼저인지 목록엔 없다
흰빛을 쓰다듬어 하늘을 가리고
다만, 푸른 잎을 보지 못하는 슬픔에 목이 멘다
눈을 뜨면 사라지는 순간들
순백의 꿈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키위 왔으나
걸어가지도 못하고 무거워 휘날리지도 못한다
드레스를 끌며 한 잎씩 널브러진다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하얀 고무신처럼
배어나는 슬픔을 끌어안고
노숙해야 하는 목련의
하안 발바닥
눈을 감은 채 슬하의 옷자락을 거둔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바람보다 가벼운 주검이
꽃의 이름으로 검은 발자국을 찍는다
♧ 선線 저 너머
은행나무 잎이 연두색 송곳처럼 뾰족한데
너머엔
아무런 색이 없는 죽은 나무
여긴 벚꽃이 절정인데
이미 지기 시작하는 저 너머
하루에 지는 꽃 피는 꽃을 다 지나와도
이곳에 서 있고 저곳에 누우니
가도 가도 건너지지 않는 그것은
분명 보이지 않는 선이다
꽃을 따라갔지만, 꽃의 세계엔 들어갈 수 없고
계절을 따라갔지만, 계절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구름 속으로 들어가면 물방울만 달라붙듯
축축한 안개가 시야를 흐린다
아무것도 공유할 수 없는
이쪽에서 저쪽까지 그어진 선 위에
발자국 같은 점,
점들만 무수히 찍혀 있다
♧ 목소리가 끌려간다
모른다고 할 수 없으나
안다고도 할 수 없어 애매해지는
어쩌다 귓바퀴를 울리는 목소리
보험 가입을 권하는 전화처럼 매정하게 끊지도 못하고
어정쩡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마음을 왜곡한다
그쪽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것을 알면서도
혀를 누르고 달래는 목소리가 테두리를 매만진다
서로 깨지지 않고
서로 열지도 않는 대화
파문도 없고 파동도 없다
줄곧 그 자리에 서서 버릇처럼
한 손으로 바닥을 문지르다
전화기를 내려놓으면
내가 그쪽으로 기울어져 한참을 버둥대고 있다
♧ 거슬러 오르는 힘으로
징검돌 근처
얕은 물 속에 잠긴 돌 위로
떼로 몰려가는 잉어들이
사람의 작은 발소리에도 깜짝 놀라 위치를 바꾼다
물결을 이루며
부드러운 왈츠를 추고 있는 치어들
한 치 더 자란 것들은
좀 깊은 쪽에서 군무를 추고
강 가장자리 물살이 없는 곳엔
막 어린이집에 온 듯 꼬맹이들이
이리저리 낯선 물살을 익힌다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물살을 거슬러 힘을 키운다
선생님도 없이 저희끼리
줄지어 같은 속도로 리듬을 맞춘다
수업 시간 종은 누가 치는지
오래 보고 있어도
다음날 가 봐도 그 자리에서
물을 읽으며 해 임치는 자습은 하염없고
물살은,
거슬러 오르는 것들의 힘으로
더 세게
은빛 날개를 퍼덕이고 있다
♧ 어떤 사이
지하철역에서 몰라보고 한 번 지나친 사이입니다
마스크로 입을 가렸고 선글라스로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나란히 걸으며 여기저기 기웃거립니다
용수염 과자를 신기해하며 하얗게 웃습니다
연인 사이는 아닙니다
길을 잘못 들어 서로의 기억을 미안해하며 헤매기도 합니다
여러 번 와 본 북촌은 예 같지 않고 창덕궁 후원 예약은 이미 매진되었고
고궁에는 앉을 자리가 없이 계단에 잠시 앉아 쉽니다
열정이 없습니다
찻집에서는 메뉴에도 없는 것을 시켜 멋쩍게 웃고
연잎밥 정식은 맛있게 먹었습니다
동동주도 곁들였습니다
다정한 노부부가 아닙니다
정치 이야기나 남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시인들 이야기가 가금 있습니다
이야기가 자주 끊어지며 약간 사이를 두고 서로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래 걷습니다
기온이 무척 올랐습니다 웃옷을 벗어 팔에 걸고 갑니다
종로3가역에서 반대 방향으로 각자의 길을 갑니다
먼 데서 왔습니다
우리는 선생과 나이 많은 제자, 사이입니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 (서정시학, 2024)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12) (3) | 2024.11.15 |
---|---|
최기종 시집 '만나자'의 시(3) (3) | 2024.11.14 |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2) (4) | 2024.11.12 |
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5) (0) | 2024.11.11 |
'애월문학' 2024 제15호의 시(1) (0) | 2024.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