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적 – 이철수
홀로 남겨진 자의 싸늘한 방
이별 적신 손수건 온기로 남아있어야 하거늘
떠나는 자의 밭은기침만이
아무도 없는 허공을 붙잡는다
고달프고 서러운 육신
서로 몸 들비비며 뒤엉킨
저 구더기의 꿀이 되었나
천장과 벽에 달라붙어
손바닥 비비며 기도하는 파리의 외침
떠난 사람의 흔적 지우는 일
숨 막히도록 아득하다
이 세상 마지막 이별 헛되도다
사랑은 끝났다고 말하지 말라
마지막 흔적이 되어준 독한 향기
구역질 날 것 같은 우리의 식은 사랑
아프게 꾸짖는다
♧ 성인봉聖人峰을 오르며 - 임애월
수천 년
직립의 시간을 지켜온 나무들
설산의 수도승처럼 묵묵하다
하늘도 비켜선
원시림 숲길
고요하게 빛나는 잎들의 환생
영혼의 수액을
정화수로 길어 올려
순백으로 피워낸 마가목 흰 꽃잎
성인聖人을 만나려면
심해의 파도 소리에
귀를 먼저 씻을 것
동해발 984m,
아타락시아로 가는 길은
난바다의 물이랑처럼 가파르다
♧ 시조 - 강상돈
얼음송이가 뿌려진 꽃밭을 걸어 갈 때
지나는 산들바람이 경계심을 늦추고
남몰래 보석 하나를 숨죽이며 캐낸다
결코 지워지지 않는 메밀꽃 잔상들이
머리를 풀어 헤친 소녀의 긴 머리처럼
마음껏 흩날리면서 온 세상을 누빈다
가식 없는 연기가 무대 위에 펼쳐지면
노을도 울컥 토해 가슴을 물들이고
노련한 연기자들의 대사도 물오른다
♧ 벽파항의 봄 – 김영란
죽어도 죽지 않는
이름을 불러본다
백의종군 그대가
살기 위해 뛰어든
검푸른 침묵의 바다
칼자루를 품는다
벼랑 끝 목숨들이
불안에 떨 때마다
진도사람 진한 연대
핏빛으로 일어선 곳
끝내는 모두 죽어서
영원히 살고 있는
*애월문학회 간 『涯月文學』 2024 제15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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