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무의 시간 1 – 여연
어둠이 내려앉은 방
벽은 흑백의 기억으로 덮인 채 서 있고
시계는 무심한 소음을 내뱉는다
소리들이 먼지처럼 흩어져 간다
창가에 늘어진 커튼 사이로
바람은 슬그머니 스며들고
모서리에 쌓인 먼지들은 어디론가 떠나려는
마음처럼 가만히 숨죽인다
길 위엔 사라진 발자국들
모래처럼 흐르는 시간의 조각들만 남아
안개에 가려진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차가운 빛이 어두운 골목을 지나
어딘가로 흡수되고
내 발 아래로 덧없는 그림자가 무너져 내린다
한쪽 벤치에 남겨진 비어있는 컵
누군가의 잔해가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고
기억의 조각들은 부서진 유리처럼 흩어져 간다
구름이 흐르는 하늘에 담긴 불확실한 약속들
빛과 어둠이 섞여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길을 잃은 나비가 휘청거린다
그녀의 날개가 어둠 속에 묻혀
소리 없이 사라지듯
시간도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모든 것이 어디선가 잊힐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텅 빈 방에 남겨진
소리 없는 속삭임과 환영처럼
허공을 가득 채운 무의미한 여운 속에서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충분하다고
♧ 샛바람 - 위인환
가을비가 내린다
무릎이 아프다고
어깨가 아프다고
오메오메 하시던 날에
한기가 스며들면
급히 집으로 돌아와
빨래를 걷고 장독을 덮는다
예보도 빗나간 날씨를
정확히 맞춰 내는 어머니
저녁을 드시고
오메 내 무릎
오메 내 어깨
입버릇처럼 호소하는 환상통
시리다.
♧ 틈새에 핀 들꽃 - 이기헌
너나 나나
콘크리트 틈새에 사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 좁은 곳에서 너는
어찌 그리 당당하게 자라났는가
비좁다는 불평불만 하나도 없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야 말았구나
도시의 틈새가 지겹다며
하루가 멀다고 투덜거리는 나는
콘크리트 실금 사이에서
멋지게 자라나 꽃을 피운
너의 모습 앞에 서서 고개 숙인다
너나 나나
외로운 틈새에 사는 건 마찬가지인데
♧ 오래된 감각 - 이동열
돌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죠 언제인지 어떻게 쥐고 있었는지 이유는 없었어요 산책길에서는 계절이 자꾸 지나가고 집에서도 돌 하나가 가득했어요 볼록한 돌이었어요 그믐밤에 꽃이 피는 사건이었죠 돌멩이를 무릎 위에 놓으면 단맛이 났고 등 뒤에선 침묵에 기대고 있었어요 내 손은 오목해졌고 돌멩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윤이 났어요 고향집에는 가마니 짜는 나무토막이 있는데 구멍마다 반질반질한 것이 어떤 맛처럼 느껴졌어요 짚으로 꼰 날줄을 타고 수없이 오르락내리락한 시간이 구멍 속에서 보이더군요 친구는 돌을 주워 잘 닦고 침대나 의자도 만들어 준다네요 방 안에 가득 차서 방이 무너지기도 한대요 그는 눕거나 앉아서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지요 가끔 돌이 굴러떨어지기도 한대요 발을 찧는 돌을 본 적도 있어요 나의 돌멩이는 손바닥에 들어오면 그득한 손이 되고 손가락으로 감싸 쥐면 잊힐 수도 있어요 이쯤 되면 홀로 있어도 혼자가 아닌 듯해요 집안에서 불꽃놀이를 했어요 불꽃 속에서 돌멩이를 보았죠 뿌옇고 잠자는 듯했지만 손에 쥐어보니 딱 볼록했어요 된장찌개 끓는 소리도 처음은 아닌 듯해요
♧ 갱년기 – 이상호
그녀의 빤스에서 붉은 꽃이 사라졌다
가는 모래 가득한 검은 눈을 끔벅거리며
옥상에 빨래를 널고 있는 하루가 말라간다
바티칸 고대문화 파편들이 득실대는
유튜브 진열장에 두 눈을 곤두세우고
실시간 타전해 오는 영상을 탐독하는
아침에도 버럭버럭, 오후에는 순둥이로
수시로 변화무쌍한 등 굽은 뒷모습이
비린내 건조되어 버려 맡을 수가 없어졌다
오랫동안 사용해서 낡고 닳은 몸뚱어리
침대 위에 가로누워 숨소리 낮춰 가며
이른 밤 그르렁거리며 잠꼬대를 하고 있다
*월간 『우리詩』 12월호(통권 제43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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