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품바, 춤이나 출까 – 김성주
옥수숫대는 새끼들을 꼭 껴안고 있었다
첫째 둘째 셋째 막내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주먹 쥐고 큰 울음 토해내며
세상에 나온 나
키질 몇 번에 쭉정이 되어 날리다
품바의 양은그릇 속으로 떨어졌다
일당 10만 원
-제일 위 하나만 남기고 다 따야 한다
밭주인의 엄중한 경고
오리걸음으로 종일 기어 다닌 고랑마다
강냉이죽을 받던
찌그러진 양은그릇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옥수숫대들이 몸을 비틀기 시작하자
바람이 일었다
오른쪽 어깨 회전근개파열
통증 치료로 5만 원을 지불하고 돌아오는 길
옅은 안개가 흐르고 있다
옥수수댓잎처럼 뻗은
이 도시의 길들은 아픈 어디에 닿으려는 걸까?
바람이 분다
♧ 거미집 – 김성진
거미집은 집도 아니다.
어느 때나 비가 새고
언제나 찬바람이 들락거리고
무허가 건물이라 등록도 안 되고
그래도 집주인 혼자 집을 지킨다.
기둥도 지붕도 없는 집에는
밤에는 별이 쏟아져 내리고
아침에는 햇살에 눈이 부신다.
전생에 무슨 업인지
무슨 팔자 사나워서 그런지
허공에 집을 지이 산다.
오래 매달려 불안할지라도
입 하나 풀칠하는 걱정 없다고
남에게 떼어 줄 것 없다고
사글세 놓을 것 없다고
그것 봐라 날 보라 그런다.
남들과 같은 슬레이트집도 아니고
내 집은 허공에 있다.
♧ 그대 곁에는 – 김승석
젊은 날 그대 곁에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있었다.
꽃이 피려고 할 때
비바람이 치듯
세풍에 흔들리지 않고
붓과 먹물만 꼭 껴안고
오로지 한글서예 외길만 걸었다.
새천년 동틀 무렵
저지예술인마을에
둥지 틀고
먹내음 붓길 따라
빗물이 곬이 져서 흘러내리듯
스무 해 걸었더니
‘파도체’와 ‘미소체’를 창안했다.
웅혼하면서도 파안대소하는
글꼴은 추사체를 닮았도다.
해는 서산에 기울고
서녘하늘은 황혼에 물드는데
그대* 곁에는
붓과 먹물만이 있고
집도 작품도 없다.
‘나는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든 누구에게 있어서든
내 것은 결코 없다.’
라는 진리를 깨달아
무소유의 도를 닦고 있다.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답도다.
그대가 허락하신다면
그대 곁에서 가슴을 열고
그대가 말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지금․여기(now & here)’
그 화두를 이야기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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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한곬 현병찬의 행장을 그리면서 님의 공덕을 예찬하는 시.
♧ 꽃잎을 밟고 - 김용길
이른 아침 산보길 돌아오다
나도 모르게 들꽃을 밟았다
햇살무더기 울담 한 곁에
이슬빛 머금고 피어난 꽃
팔랑거리는 잎새 사이
손가락 같은 작은 얼골 내밀어
수줍은 웃음 흘리던 꽃송이
*혜향문학회 간 『혜향문학』 2024년 하반기(통권 제23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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