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볕뉘
잠시 틈 사이에 머물던 볕뉘
겨울잠에서 깨어나 봄이 되는 것처럼
나에게 묻는다
누구를 위해 잠시 멈춘 때가 있었나
누구를 위해,
잠시 뒤를 돌아본 적이 있었는가
잠시 그늘에 미치던 볕뉘
그 자리에 민들레가 피어 있는 것처럼
나에게 대답한다
이제야 발아래 밟힌 들꽃을 보았다오
미처,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을 보지 못했다오
♧ 많은, 너무 많은
내속에
많은 나와
너무 많은
딴생각들
널브러진
겨울, 밤, 바람
기다리지 못하는
봄, 아침, 꽃
♧ 불면증․3
내겐
신이 준
마지막 선물인 망각도 받지 못하고
밤의 허리춤에 서 있다가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멈추었다.
♧ 포맷
어느 날부터 인가 내 서재 컴퓨터가 느려졌다 무언가를 하려면 프로그램 작동이 되지 않는다 아니 이미 저장된 내 마음의 파일들은 불러올 수 없는 파일이라 호칭 된다 바이러스 때문일까? 백신 치료? 별짓을 다해 봤지만 좋아지질 않는다 시간의 흐름은 나의 글자 부스러기를 더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애프터서비스 기간의 경과로 동네 닥터 PC의 도움을 요청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아예 포맷하시죠.” 원 상태로 복구할 수 없다면, 다시 필요한 프로그램을 깔고 사용하란다 ‘싹 다 지우고…, 필요한 것만 다시…’
나도… 다시…
♧ 엿듣다
줄줄이 스며든 빗물과
그렇게 내리쳤던 햇볕
바람결로 새겨진 얼룩과
눈발에 지친 껍질
칠십 여 사월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동네 어귀 폭낭
닭발처럼 찍힌 뿌리가
끝끝내
못다 한
인연들의
질긴 총성을
엿듣다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월간문학 출판부, 2024)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간 '제주작가' 2024 겨울호의 시(2) (0) | 2025.01.12 |
---|---|
한라산문학 2024, 제37집의 시(2) (0) | 2025.01.11 |
'혜향문학' 2024년 하반기호의 시(3) (0) | 2025.01.09 |
'애월문학' 2024 제15의 시조(7) (0) | 2025.01.08 |
최기종 시집 '만나자'의 시(7) (0) | 2025.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