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2024 겨울호의 시(2)

by 김창집1 2025. 1. 12.

 

 

비 내리는 동경의 밤 - 김경훈

    -1943

 

적국 일본의 심장부

동경에 비가 내린다 칙칙한 검은색의

개미군단처럼 쏟아지는 인파 위로

비가 내린다 아시아 식민지를 향한

제국의 음모 위로도 비가 내린다

그 제국을 삼킬 더 큰 제국 아메리카 군대의 상륙과

전승자 미국을 숭앙하게 될 쪽발이 왜놈들의 미래 위로도

비가 내린다 이중 삼중의 식민지

재일조선인들의 꾀죄죄한 삶 위로도

비가 내린다 아, 조선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가

우울한 심사 위로 비는 내리고 또 내린다

 

 


 

나비 날아오르다 김광렬

 

 

까만 테두리가 노란 물방울무늬들을 동글동글 감싼

나비 날개와 날개 사이 번쩍이는 흰 금속성 핀이 차갑다

 

저 먼 곳 셀레베스에서 온 그라피움 아가멤논이라는

학명의 나비,

박제되어 날지 못하는 몸이 슬프게 제 영혼을 부르며

날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순간,

나비의 영혼을 내 안에 한 그루 나무처럼 식목한다

그리고 나비처럼 양팔을 펴들고

힘껏 허공을 날아오르는 시늉을 한다

 

그때다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오랜 통증의 근거를

햇살에 드러내며

날아가는 나비의 환영을 본 것은

 

억압하는 자의 욕망이 클수록

벗어나려는 자의 몸짓 또한 큰 것임을

입증하고야 말겠다는 듯 드디어 틀을 깨고 날아올랐다

 

 


 

외출 김대용

 

 

한밤중에 담배 사려고

집밖으로 나가는 일은

그에게 가끔 있는 흔한 일이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다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인 그가 비 내리면

드문 외출도 한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있다

 

요새 그는 눈물이 많아졌다

음악을 들으며 운다

비를 맞으며 눈물 흘린다

그는 누구에게 눈물 흘리게

한 적이 없는가? 라고 생각한다

 

아는 사람이 부고를 받았다

깊고 오랜 잠에서 깨면

연민으로 울어주마

잠에서 깨면 다시

파친코 시리즈 드라마를

끝도 없이 다시 보며

 

 


 

기다림 김병택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놀이 삼아 항해하는 그들은

닻을 내리는 데에 아주 서툴렀다

 

공중으로 치솟는 파도가 무서워서라도

그럴 듯한 솜씨를 익혔을 법한데

 

번번이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바다를 보는 눈이 흐렸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해야 한다는 압박이

머리를 세게 두드릴 때마다

한 사람은 하늘에 대해서 ,

다른 한 사람은 땅에 대해서 말했다

 

무대에는 남루한 광선들이 모여 들었고

 

막연하게 고도가 오리라고 믿으며

고도를 끝까지 기다리는 일은

분초 단위로 기운을 빠지게 했다

 

그래도 기다리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바다 항해가 그러했던 것처럼

 

허망한 안개가 내려앉은 무대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시간을 사용했다

 

기억이 자꾸 고개를 외로 돌리고 있는데도

 

 

                                            *김영화 '그 겨울로부터'
 

북받친밭 - 김순선

   - 그 겨울로부터 김영화 개인전을 보고

 

 

조릿대가 눈 위에서 떨고 있다

눈 위를 걸어간

움푹 파인 발자국을 바라보며

겨울에서 봄으로

봄에서 여름까지

걷고 걷고 수없이

걸었던 길

 

깊은 땅속에서 길어 올린

눈물 같은

잎맥 하나하나에 번진

검은 땀방울들

신들린 사람처럼 수천수만 번의

외로운 작은 펜의 고행길

풀잎이 되고 조릿대가 되고 고사리가 되고 천남성이 되어

그 방대한 숲에서 안개처럼 밀려오는

쫓기던 발자국들의 숨결을

오롯이

진정한 마음조차

외면당한

값없는 죽음이 되어버린

쓸쓸한 무덤가에

때죽나무꽃

눈 나린다

 

 

              *계간 제주작가2024 겨울호(통권 제8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