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예나 지금이나, 나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일상의
경험이다. 그것은 나의 시가 대부분 일상의 경험을
소재로 삼고 있는 점과 크게 관련이 있다. ‘아득한 상
실’은 일상의 경험도 결국에 가서는 사물처럼 소멸하
는 것임을 확인하는 비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2024년 가을
김병택
♧ 봄의 약전略傳
오름의 눈이 사라질 때야 비로소
마을 가운데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구름을 따라
새들이 날아다니는 저녁이면
나무 우듬지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거느리고 온 것들 중에는 오랫동안
망각할 수 없는 겨울의 추억도
항상 칙칙하던 겨울의 모습도 있었다
얼마나 긴 고통의 시간을 건너
여기까지 왔는지를 다 말하기는 어려워도
어두운 동굴에서 겪은 일들은 분명
지울 수 없는 경험이 되었을 터였다
추위에 부딪힌 푸르죽죽한 모자를 쓰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찾아올 땐
축배의 노래를 부르며 맞이하고 싶었다
올해에도 한 편의 소설 제목처럼 찾아와
들판 여기저기서 아무렇게나
지금까지 지켜온 꿈의 음절들을 퍼뜨렸다
옛날의 울퉁불퉁한 기억들을 일깨우며
♧ 할아버지의 벚나무
집 뒤뜰 구석 돌무더기 옆에는
증조부가 젊었을 때 심어 놓은
벚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4월 초, 따뜻한 공기가 흘러
짙은 녹색으로 치장한 때부터는
투명한 분홍색 꽃을 터트리며
다른 나무들 위에 군림하곤 했다
부드러운 외양이어서 그런지
거센 강풍이 부는 여름에도
수시로 눈비 내리는 겨울에도
가까스로 험한 세월을 견디었다
빛바랜 내 일기장에는
봄날의 벚꽃을 향한 기억도
사건들로 타올랐던 기억도
증조부에 대한 기억도
편편이 살아 뒹굴고 있었다
희망의 표지판을 세워 놓았다
안팎을 모두 기억하는 그림자들은
항상 이곳을 거쳐 드나들기를
♧ 가을 주변
미명의 시간을 헤치며 찾아온
가을의 일요일 아침, 구름이
마당에 엷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공중에 떠 있는 나뭇가지들이
집 앞 바닷가의 물결소리에
허무한 몸짓으로 흔들린다
창문을 열고 바라본 산은
여러 번 넘어지며 달려온
이 마을 사람들의 상처를
항아리 모양으로 품은 듯하다
마당을 몇 바퀴 돌던 바람이
화단의 구석 쪽 바위에 부딪힌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낙엽들이
메마른 돌담들 사이에서 파닥인다
산속 절의 대웅전에서 들려오는
녹색의 독경소리가 들릴 때야 비로소
나무 밑 벤치에 앉았던 몸을 곧추세운다
♧ 깊어지는 겨울
나뭇잎들의 시린 물결 위에서
끊임없이 서성거리는 미물들만으로도
나뭇가지 곁을 떠도는 적막만으로도
파르르 날아가는 새의 비상飛翔만으로도
겨울이 깊어가고 있음을 알겠다
누가 일부러 애써 만든 적이 없는
길고 긴 진흙 길이 저절로 생겼다
뒹구는 눈의 사체들도 눈에 들어온다
수북이 쌓이는 시간을 허물며
한바탕 숲 주위를 휘돌고 온 바람이
검은 털구름을 동반하고 멀리 사라진다
드디어 붙잡은 희망 한 줄기를 품고
지난날을 참회하기 위해 산사山寺를 찾는
중년 남자의 발걸음이 가물가물하다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 (황금알,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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