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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겨울호의 시(3)

by 김창집1 2025. 1. 24.

 

 

때로는 사랑도 없이 - 김승립

 

 

해보는 생각으로 날이 저물곤 했습니다

어느 시냇물로부터 이 바다의 설움이 깊어졌는지

허공을 부는 바람은 어느 벼랑에서 그만 질주를 멈출 것인지

별자리가 수십 차례 몸을 바꿨는데도

당신의 별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가끔씩 무릎이 저려올 때도 있고

등 날갯죽지가 잘 펴지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상하지요

호린 눈으로도 그 옛날 당신의 눈부처는

또렷이 새겨 읽을 수 있습니다

손끝마다 무슨 소용 있겠는가마는

지난 시절의 무지와 무참한 과오에 장을 지지기도 합니다

어찌 알 수 있었겠는지요

사랑 같은 게 누군가에겐 버거운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바닷물이 고요하게 밀려와 겨우 발목만 적시고 물러가듯

마음조차 적당히 덜어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당신의 눈길을 그만 무겁게 내려앉게 했나 봅니다

함부로 사랑하고 함부로 약속하고 함부로 우격다짐 했던

지나고 보니 그것은 사랑보다는 필요에 가까웠습니다

그 시간의 나를 당신 앞에 무릎 꿇리고 싶습니다

이제 머리털은 듬성듬성 빠지고 세월만큼 하얗게 세어졌지만

당시의 표정이 어떠할 지는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용서 하세요 간신히 고백하건대

때로는 사랑 같은 것도 버려두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곤을동 정원 김항신

 

 

1.

당신을 친견하던 날

하필 촉촉한 눈물로 반기더이다

바다와 맞닿은

청 푸른 수국, 참나리, 산부추, 동백,

그대들은

혼으로 빚어 놓은 세월이라 해도 좋을

만큼, 비록 육신은 무릉도원 넘을지언정

혼불은 영원하여 꺼지지 않은

도원경이겠습니다

 

물안개 피어나던 순간순간 눈에

담아 봅니다

 

물 길어 올리던 용천수,

바가지 빛바랜 흔적 하나

 

우영팟*, 돗도고리**

다소곳이

 

맑은 물

혼으로 빚어낸 경이로운 흔적들에

 

두루미 선에 들더이다

 

 


 

2.

역사의 뒤안길에 묻힐 수 없는

영원성불

 

어떤 칠월의 습한 날

짓무른 눈물이 한으로 남던 날

불볕 같던 그 더위 속에

덜 익어 풋내 나던 날

 

생생하게 눈에 들어오던

사투의 시간

알몸 되어 능선 오르던

그날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뜨거웠으면 실오라기

없이 뛰쳐나와 산으로 산으로

부둥키며 부추기며 오르는지

 

구르며 질척이는 현장을

먹먹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정녕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서투른 시인이었던 내가

헤집어 낼 수 없었던 세월, 13년이

돼버린 지금에야 조금은 헤아릴 수

오늘, 이겠습니다

 

영령들이시여! 함께 영원할 곤을동 동백들이시여!

 

---

* 우영팟 : 텃밭

**돗도고리 : 돼지의 먹이통.

 

 


 

속눈썹 - 김혜연

 

 

낮이었지

감긴 아버지의 속눈썹은

마지막으로 까만 씨앗들을 퍼트렸지

오므라졌다 부푸는 나의 심장은

욕지기하듯 삶을 꽉 붙들고 있었는데

 

알지 못했다고 해서 모름이 되지 않을

수십의 밤 동안

끝없이 피어난 검음들 속에서

당신의 심장은 몇 번의 표피가 벗겨졌는지

짐작도 할 수 없지

 

낮과 밤을 사는 것이

생과 사를 건너가는 일처럼

아무도 모르게 흔적 없이

대어나 이미 죽은 것처럼

 

당신은 나의 지난 세계

당신들의 종말이 촘촘히 채운 나의 까만 밤

그 속에 나를 향한 길고 긴 속눈썹

 

모로 누워 잠든 아버지와 마주 누워

마지막 숨을

까만 종말의 탄생을 바라보네

슬픔만이 내 일인 양

당신과 닮은 속눈썹으로

 

 


 

가로등 빛 나기철

 

 

육십 대 중반이고 택시 몬 지 십오 년 됐수다

초등만 나와 버스 안내양부터 이것저것 많이

모든 게 맞아야 하는데 전 차가 맞수다

칠십오 세까지는 해얍주

 

 


 

남양여인숙 2 - 문무병

     -70년대 골빈당 시절에 잃어버린 <청개구리 신화>

 

 

70년 초 나이 스물두세살 무렵의 팔팔한 청년들, 아니 무서운 청년들

누가 홍길동의 활빈당을 이야기 하면,

우리 골빈당이 옳다고 우기던 청년들,

내로라하는 도둑놈들이 모였으니 잘 놀아야 할 게 아니냐며

소라다방에 앉아 역적모의를 하던 악동들이 결성한

골빈당>의 우두머리는 문 아무개였다.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 골빈 놈들의 괴수,

나는 마형이라고 불리던 악동들의 선봉장이었다.

실존주의 철학과 부조리 문학이 당대의 문화계를 풍미하던 당시,

학삐리와 야쓱 간 문학광들을 모아놓고

나는 제주라는 우주의 중심에서 진득한 낭만으로

감성의 시대를 열어나가자며 엉뚱한 선언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그 선언이 바로 <골빈당 선언>이며, 선언문은 <청개구리 신화>였다.

선언문은 원고지 100매 분량으로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반항적 인간>에 맞먹는

재치 있고 기지 발랄한 명문(?)이었다 사료된다.

그러나 왜 이런 명문의 선언문이 초라하게 취급을 받아야 하냐?"

소라가의 어느 쓰레기통에 내팽개쳐 버려진 채 유실되어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정말 안타까운 사건이 있으나

혹자는 골빈당 선언문답게 사라져버린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내가 쓴 초고는 반항적인 청개구리의 이야기였다.

모친수장의 당위성을 주장했던 반항적 선언문이었으나

이데올로기와 당파성을 배제한 대신 낭만적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골빈당은

골이 빈 사람들의 모임인가

골을 비운 사람들의 모임인가 하는

근본적인 쟁점이 지금도 흔들린다.

, 욕망 앞에 흔들리는 진리여.

왜냐면 화끈하지 못하고 좀 비겁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70년대 <골빈당>은 우리들의 중심이었고,

그 모임 터는 소라다방이었다.

소라다방 근처 남문 한짓골[南門大路村]을 우린 소라가로 불렀다.

소라가를 주름잡던 시절, 우리들의 엽기적 삶은 좌충우돌하였다.

구두를 벗어버리자면 누구나 고무신을 신고 나와 거리를 쏘다녔고,

사르트르, 카뮈, 카프카를 이야기하고,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의 의식의 흐름을 논했다.

스탕달의 적과 혹,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이야기했고,

라이너마리어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감명 깊게 읽었다는 것 하나 때문에 한 여자를 사랑하였다.

첫눈이 오는 날 우리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자며

첫눈 오는 날을 끝없이 기다리기도 하였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나는 첫사랑의 여자와

손수건 흔들며 배가 멀리 물마루로 사라질 때까지

이별을 아쉬워하던 산지항 동부두 방파젯길이여.

겨울 산행에서 눈에 빠진 여인을 일으키며 처음 느꼈단 사랑

한라산 초기밭의 다시 오지 않는 2, 설국 눈밭의 사랑 등.

끝없이 만나고 해어지면서 끝없이 쌓았던 70년대식

사랑법을 짧은 지면에 다 소개할 수 있을까. 하나만 소개할까.

나와 나() 시인이 처음 만나던 이 사건은 잊을 수 없다.

추석 전 날 나 시인이 사랑하던 여중생 미복이, 그 아이는

내 아르바이트 제자였다.

미복이 어머니의 죽음과 거기서 만난

나기철과 문무병의 기막힌 인연은 우연이었을까.

그날은 추석 전날 저녁 무렵이었다.

하역작업을 하던 화물선에서 쌀 10가마가 바다에 떨어져 침수되었다.

선주는 우리 동네 해녀들에게 부탁하여 쌀 10가마를 건져내면

1가마를 주겠다고 했다.

미복이 어머니가 추석 제수를 마련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바닷물에 들어가

쌀가마에 줄을 매고 나오다 숨이 막혀

배 밑창에서 붙어 빠져나오지 못한 채 운명하고 말았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추석 전야 미복이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던 나기철 시인은 고등학교 1학년,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재수생이었다.

둘은 술집에 갔다. 막걸리를 마시며 울었다.

사랑은 그런 거라며 술을 권하던 나와 기철이,

그때부터 50년의 우정과 낭만은 정을 이어왔다.

우린 그렇게 맹목적이고 따뜻한 계절이 그립다.

그렇게 하며 아낌없이 주고받던 사랑,

소라다방과 여명실비집 주변을 돌며 무진무진 마시던 술,

이백과 두보, 도연명, 백낙천, 소동파,

이하, 이상은의 한시를 외며 마시던 술,

한라산 아흔아흡골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일주일 내내 술을 푸던 회수일음삼백배를

어찌 다 이를 수 있겠나, 그만두자.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소라시절의 낭만은

전무후무한 한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골빈당의 소라다방 시절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18세기의 낭만과 20세기 실존주의가 문학다방 소라에서 시작되었고,

그 폭풍의 핵으로 등장한다.

그때 내 별명은 마형이었다.

악마 같은 형이라는 애정이 담긴 거짓말이

나를 사랑하는 연인들의 준 선물이었던가.

그 당시 내 문학의 발상지는 <토요구락부>였다.

토요일만 되면 만나서 문학을 이야기하는 모임을 만들자고

스승 김시태 교수가 제안하여 교수를 따르던 문학청년들의 모임,

김병택, 고시홍, 문성숙, 문무병 등 제주대학 국문과 출신

시인 소설가 지망생들이 아직 등단을 못했던 시절,

희곡을 쓰는 내 친구 장일홍,

정순희, 김진자, 강영희 등 교육대학 초등학교 교사 시인들이

같이 동인활동을 하였다.

이들의 문학적 특징과 성향은

학구파 김병택, 달변과 광기 장일홍, 문무병,

실전파 고시홍, 엉뚱한 김진자 등이 떠오른다.

끝없이 달아오르던 문학논쟁, 아무튼 이 모든 것을 골고루 지닌

엉뚱파 김시태 교수는 문학의 수장이었다.

토요구락부 동인의 특징은 모두 술고래였다는 거다.

문학보다 술이 우선했다는 점에서

문학의 가능성을 많이 보인 그룹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느 날 김시태 교수 왈,

, 무병아, 넌 꼭 헤세를 닮았어, 저 뿔테 안경도 그렇고 말이야.”라고

김시태 교수가 추켜올리자 그때부터 나에겐 또 하나의 별명 해르만 헤세가 내 이름에 붙었고, 헤세처럼 군림하였다.

정말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나는 정말 연극이다 민속학이다

바쁘게 살았는데,

1990년 늦게나마 김시태 교수께서 주간으로 있는 문학과 비평

신인상을 받고 시인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시를 알아주었던 스승은 또 한분 계시다.

1985<민족과 굿>

장편 굿시 날랑 죽건 닥밭에 묻엉을 발표했을 때,

백기완 선생님이 어느 누구보다 좋은 시인이 될 것이라 칭찬해 주시던 일, 등단도 하기 전인데 말이다.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해 주신 김시태 교수와 백기완 선생님은

끊을 수 없는 인연이었다.

나는 두 분 때문에 문학을 하게 되었음을 행복하게 생각한다.

 

 

                  *계간 제주작가2024년 겨울(통권 제87)에서

                                     *사진 : '달과 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