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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월호의 시(4)

by 김창집1 2025. 1. 27.

 

 

입동 이산

 

 

갓 지난 입동立冬의 찬바람이 불고

외진 공원의 연못 주위로 낙엽은 쌓이는데

서너 길 떨어진 수문이 열리고 있다

 

삼짇날 즈음 날아와 알을 품고 깨어난 오리 떼

때를 잊은 듯 자맥질로 바쁘고

미꾸리는 필사적으로 달아나는데

아직은

수초水草도 날렵한 허리춤을 추고 있다

 

윤슬은 시들고

수위는 벌써 발목 아래로

 

 


 

사려니숲 까마귀 이상인

 

 

까옥 까옥 깍깍

 

검은 봉다리에 욕심껏 부풀어 오른

시커먼 울음소리

한세상 모두 토해 내고

뼛속까지 깨끗이 다 비워 내야

 

비로소

훨훨 떠날 수 있다고 한다

 

 


 

제품 사용 설명서 - 이영란

 

 

창문은 열려 있거나 닫혀 있거나

심장이 두근거릴 때 뛰어내린다

 

끝말잇기를 하다가

끝말을 먹어 버린 남자

 

터널 속으로 들어간 노인은

늙지 않는 중이다

 

시는 재미없어

아이가 캥거루에게 귓속말을 하고

 

의류 건조기에는 아침부터

사람이 많이 다녀갔다

 

시를 쓰던 여자

키보드를 하나 둘 뽑아낸다

 

까마귀 소리가 들린다

오늘 아침엔 샌드위치를 먹었다

 

이상해

아이가 거울을 보다가

얼굴을 뒤집어 놓는다

 

나는 여름이 지나간 줄도 모르고

 

여름을 기다린다

 

 


 

나팔꽃 - 이주리

 

 

아침,

나팔꽃이 주먹을 쥐었다 펴는 시간

살려 달라고,

살려 달라고

어젯밤의 절규가

어두운 주먹 속에 잠겨 있던 손금

찰랑찰랑 수면 위로 떠오른 잎맥

매일 처음 맞는 아침을 들어 올리는

역설의 중력

운명이라고

어쩔 수 없다고

잎에 지문을 새기며

스스로에게 낙관을 찍는 아침

남들의 낙인 따위는 아침 이슬보다 짧았다

트럼펫 소리에 손을 펴 보니

운명은 꽃 속으로 길을 내었다

 

 


 

마지막 편지 홍해리

 

 

가으내 겨우내 너를 기다리다

만나지 못하고 이제 간다고

마지막으로 한 자 적어 남긴다

 

죽을 때까지는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라고

사날 좋게 살 만큼 살아 보라고

 

세상에 특별할 게 뭐가 있다고

저 혼자 못났다고 우는 것이나

꽂이나 푸나무가 우는 것 봤냐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너요

세상의 중심이 바로 너요

세상을 세상이게 하는 게 바로 너다.

 

 

                         * 월간 우리1월호(통권 제439)에서